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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신

金相臣

1886. 8. 25 ~ 1949.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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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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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임실(任實)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임실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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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이석용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6년 8월 25일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성수면(聖壽面) 왕방리(旺訪里) 원증(元增) 마을에서 출생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김성율(金成律, 金成慄)이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서울의 시위대와 원주(原州)의 진위대 군인들의 무장봉기를 시작으로 정미의병(丁未義兵)의 항쟁이 전개되었다. 동향 출신인 의병장 이석용(李錫庸)은 1907년 8월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에 종사(從事)로 참여하였다가, 같은 해 9월 4일 전북 진안군(鎭安郡) 석전리(石田里)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구성하였다. 이때 김사원(金士元)·김공실(金公實)과 함께 도로부장(道路部長)에 임명되었다. 이석용 의병부대는 1907년에서 1908년까지 진안과 장수(長水) 등지에서 일본군 및 그 기반 시설들을 공격하여 다수의 전과를 올렸으나, 1909년 9월 임실 전투 패전 후 일단 부대를 해산하였다. 그럼에도 이석용 의병장과 행동을 함께하며,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도 의병 활동을 위한 군자금 조달 활동을 벌였다. 1911년 11월 22일 밤 이석용·김필수(金必洙)·박보국(朴甫局)·정남쇠(丁南釗)·홍윤무(洪允武)·박동환(朴東煥)·한일성(韓日成) 외 4명과 함께 화승총 6자루 및 도검으로 무장하고, 전북 장수군 진전면(眞田面) 월파리(月坡里)의 진전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그 결과 일제가 징수한 세금(稅金) 133원 72전, 면비(面費) 50원 44전, 사금(私金) 28원 82전 및 수제금고 2개를 군자금으로 징발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1912년 말까지 김필수 등 6명과 군자금 조달 활동을 지속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힌 것으로 추정된다. 1913년 2월 2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일본인 검사 무라카미 기요시(村上淸) 입회 하에 이른바 ‘강도상인(强盜傷人) 및 강도죄’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13년 3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복역 이후의 자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1949년 9월 12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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