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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학

金奉學

1871 ~ 1905.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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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봉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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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황주(黃州)계몽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황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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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을사늑약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71년경 황해도 황주군(黃州郡)에서 태어났다. 본관과 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 등으로 각지에서 의병(義兵)이 거의하자, 경기도 이천 의병부대(利川義陣)에서 참여하였다. 이천 의병부대는 일기삼대육초법(一騎三隊六哨法)에 의거하여 기(騎)·대(隊)·초(哨)를 중심으로 편제되었고, 1기(騎)에는 3대(隊)가, 1대에는 6초(哨)가 편제되었다. 이천 의병부대는 3기로 구성되어 총 3기 9대 54초의 편제를 갖추고 있었다. 1초의 병력은 18명 내외로 구성되었다. 그는 제1기(騎) 제2대(隊) 십장(什長)으로 휘하에 6초의 병력(100여 명)을 지휘하면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천 의병부대가 해산된 이후에는 대한제국 군대에 입대하여 평양진위대(平壤鎭衛隊) 제7대대에서 복무 중, 지방군대가 서울에서 근무하는 징상대(徵上隊)로 주둔하게 되자 제3대대 제2중대 3소대에 배속되었다. 이때 덕수궁(德壽宮) 포덕문(布德門) 앞에서 근무하였다. 복무 중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전국 각지에서 우국지사들이 자결하자 비분강개하여 “대대로 나라의 녹을 받은 집안에서 충성으로 목숨으로 바치는 것이 소양이니, 우리 또한 나라에서 양성한 군인이라. 이미 전투에 임하여 전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민들에게 힘쓰고 격려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직분이라”하고 통탄하면서 자결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에 1905년 12월 2일 음독 자결하여 사망하였다.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 의거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자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동지들과 모의하여 말하기를 ‘나는 지금 궐문을 파수하고 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조만간 반드시 궐문에 이를 것이니 이때를 기다려 반드시 그를 죽일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일이 발각되었고 체포를 면할 길이 없음을 알고 약을 먹고 자결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대한제국은 충정(忠情)을 기리고 포상하고자 정3품(正三品) 통정대부(通正大夫) 법부참서관(法部參書官)으로 추증(追贈)하고, 장례비를 지원하여 순국의 의미를 높이 샀다. 이때 무명과 베 각 30필(疋), 현금 200원(元), 쌀 5석(石)이 지급되었다. 1905년 12월 5일 서울 봉학정(鳳鶴亭)에서 치루어진 장례식에는 다수의 장교와 병사들이 참석하였다. 그의 죽음은 당시 ‘충의(忠義)의 순국’으로 널리 알려져 일반과 군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는 그의 죽음을 “의(義)를 부식(扶植)할 뿐 아니라 군인의 모범이 될지로다”라고 하여 ‘의(義)’로운 죽음으로 다루었다. 당시 각 기록이나 저술에서 한말 순국지사가 언급될 때면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이상철(李相哲)·송병선(宋秉璿) 등과 함께 반드시 언급되어 대표적인 우국지사로 추앙받았다. 『고종실록』 1905년 12월 6일조 기록에 “그의 자결문제로 관병(官兵) 중에서 현임대신(現任大臣)들을 국적시(國賊視)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2명의 관병이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에게 총을 들이대는 일이 일어났다”라고 기록하였다. 한편, 근위대(近衛隊) 병사 김복성(金福成)이 서울 아현(阿峴) 근처의 주점에서 일진회(一進會) 회원이 합방론을 논하는 것을 듣고 맹렬히 싸운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계몽가사(啓蒙歌詞)로 만들어졌는데, 『대한매일신보』에서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운문 형식으로 표현한 「사회등(社會燈)」코너에 1909년 12월 19일 게재되었다. 여기에 그가 언급된다. 가사 내용은 “근위대병(近衛隊兵) 김복성(金福成)은 아현(阿峴) 근처 주로상(酒壚上)에 일진회(一進會)를 봉착(逢着)하여 합방론(合邦論)을 방청(傍聽)타가 충담의혈(忠膽義血)이 일어나서 혁대(革帶) 화로(火爐) 모두 들어 일장맹타(一場猛打) 하였다니, 김봉학(金奉學)씨 일거후(一去後)에 그 유풍(遺風)이 적막(寂寞)터니 계적자(繼跡者)가 또 나왔데”라고 하여 김복성의 행동은 결국 김봉학의 순국 유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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