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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몽룡

金夢龍

1898. 9. 7 ~ 197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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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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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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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
  • · 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8년 9월 7일 경성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영동(榮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도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3월 18일 병곡면 병곡동(柄谷洞)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영해면(寧海面) 장터의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전개된 영덕 지역의 3·1운동은 총 9개 면 가운데 6개 면에서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 가운데 영덕 북부의 영해면·병곡면·창수면(蒼水面)의 시위는 경북 도내에서도 가장 격렬했던 시위였다. 병곡면의 만세 시위는 영해면 만세 시위와 연동되어 전개되었다. 영해면의 만세 시위는 영덕군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에 의해 처음 제안되어, 낙평동 교회 구세군 참위로 있던 권태원(權泰源)과 병곡면 송천동(松川洞) 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의 주도하에 추진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은 물론 영덕 유림의 5대 성씨인 권씨·남씨·박씨·백씨·이씨 문중까지 규합해냄으로써 기독교와 유림의 연합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만세 시위는 영해면 장날인 3월 18일을 기해 일어났다. 정규하·남여명(南汝明)·권영조(權永祚)·박희락(朴羲洛) 등의 선도에 따라 3,000여 명의 군중은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평화적인 형태를 띠던 만세 시위는 영해경찰관주재소 주임순사 스즈키(鈴木鶴次郞)의 강압적인 해산 명령 이후 그에 반발한 군중에 의해 오히려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시위대는 스즈키 이하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들을 구타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관주재소를 비롯하여 공립보통학교, 공립심상소학교, 면사무소, 우편소 등의 시설들을 차례로 파괴해 갔다. 400~500여 명의 군중은 정규하 등의 인도에 따라 병곡면으로 이동하여 만세 시위를 이어갔다. 영해면을 출발한 시위대가 자신의 집 앞을 지나갈 때 사람들로부터 시위 참여를 권고받고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병곡동에 이르러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 내 공문서나 탁자 등의 잡기를 훼손했을 뿐만 아니라 건물 대부분을 파괴하는 데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병곡면의 시위는 도망쳤던 일본인 순사가 평해 헌병분견소에서 파견된 헌병들과 합세하여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상황이 변하였다. 시위를 지휘하던 정규하는 한국인 순사보들의 인도를 요구하였지만, 일본 군경은 시위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군중의 피해를 우려한 정규하의 종용에 따라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만세 시위는 이튿날에도 재개되었다. 그러나 오전 10시경 포항에서 헌병대가, 오후 5시 대구에서 보병 80연대가 도착하여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가 해산한 이후에는 시위 주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속이 뒤를 이었다. 이때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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