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경
金茂景1863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민종식 의진
- · 이남규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관련 사건
- · 중기의병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3) 1863년경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동상면(東上面) 장곡리(長谷里)에서 태어났다. 집안 및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하는 김무경(金武京)과 김익포(金益浦)가 있다. 1906년 3월 민종식(閔宗植) 의진(義陳,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청양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충남 지역의 의병 운동을 이끌었던 것은 홍주 지역의 의병이었다. 홍주에서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06년부터 의병 봉기의 움직임이 있었다. 홍주의병을 이끈 인물 중 한 명인 안병찬(安炳瓚)은 1906년 3월 11일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전 참판 민종식을 찾아가 총수의 책임을 받아줄 것을 청하였다. 민종식은 1906년 3월 15일 의병대장직에 올랐고 자신이 거주하는 청양군 정산면(定山面)의 천장리(天庄里)를 근거지로 삼고, 홍주의병을 봉기하였다. 이 무렵 민종식(閔宗植) 의진에 참여하였다. 홍주의병은 3월 17일 합천에서 관군과 일본 헌병대에게 기습 공격을 받아 안병찬 등 23명이 체포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지 만, 굴하지 않고 각지로 흩어져 활동을 계속하였다. 5월 9일 충남 홍산군(洪山郡) 지치동 주막에서 다시 민종식을 대장으로 하여 재봉기하였다. 5월 13일 서천 관아에 돌입한 의병부대는 서천 군수 이종석(李鍾奭)을 감금하고 양총(洋銃) 등 무기를 획득하였다. 다음 날 비인을 함락하고 남포로 가서 남포 읍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5월 20일 아침 홍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20일부터 공주의 고문부 경찰과 수원의 헌병부대를 증파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22일에는 서울 경무고문부의 하이바라(排原) 경시와 한국인 경무관 및 그 부하 20명이 증파되었으며, 24일 통감부 경무고문 마루야마(丸山)가 홍주로 내려와 의병의 형세를 살폈다. 하지만 홍주의병은 일본 경찰을 체포하고 일진회원을 사로잡아 처형하는 등 유리한 전황을 만들어나갔다. 그러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군대 파견을 결정하였다. 5월 27일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보병 2개 중대를 파견하였고, 인근의 경찰·헌병·진위대의 협조를 명령하였다. 5월 30일 일본군이 홍주성을 포위하였으며, 31일 홍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동료 의병들과 함께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패퇴하고 말았다. 홍주성전투에서 패퇴한 민종식을 비롯한 지휘부는 성을 빠져나와 후일을 도모하였다. 1906년 10월경 이남규(李南珪)의 집에서 다시 회합한 지휘부는 11월 20일 예산을 공격하여 재봉기를 결의하였다. 하지만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 일본 헌병 10여 명과 지방병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의 포위 습격을 받아 지휘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말았다. 민종식은 미리 대피하여 이 당시 체포를 면할 수 있었지만, 11월 20일 결국 체포되었다. 이로인해 지도부에 의한 재봉기는 무산되었다. 하지만 홍주성전투에서 탈출한 다른 의병들과 함께 이후에도 부여·정산·당진(唐津) 등으로 흩어져 의병 항쟁을 지속하였다. 동료 의병들과 홍주성 전투 이후에도 굴하지 않고 1909년 중엽 무렵까지 의병 활동을 이어갔다. 1909년 7월 17일 청양군 동상면 장곡리 자택에서 동료 김동락(金東洛)과 함께 부여군의 순사와 헌병대에게 붙잡혔다. 1910년 3월 22일 강도죄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곽금선⋮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