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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덕

金商悳

1852 ~ 1906.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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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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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保寧)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보령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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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홍주성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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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정사(正斯), 호는 위관(韋觀)이다. 출생 연도는 알려진 바 없으나,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52년 충청남도 보령군(保寧郡) 주포면(周浦面) 보령리(保寧里)에서 아버지 김창재(金昌載)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했다고 한다.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의 8세손이다. 가학으로 한학을 수학하였다.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문인인 한간(寒澗) 김한록(金漢祿)이 종증조로 그의 호론(湖論)의 학풍을 계승하였다. 상경하여 초기에는 민영환(閔泳煥)의 막빈(幕賓)으로 있었다. 1886년 7월 내무부의 부주사로 등용되어 관직의 길로 들어섰다. 33세 되던 1888년 문과 별시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8월 지평(持平)에 제수되었으며, 11월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889년 8월 주진독리(駐津督理) 김명규(金明圭)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중국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공관에서 근무하였다. 1890년 귀국하여 그해 10월 규장각 직각(直閣)이 되었다. 1891년 7월 사간원의 사간(司諫)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식년시 복시의 시관으로 있던 중 남정철 등 다른 시관들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져 장흥(長興)으로 유배되었다가 11월 풀려났다. 1892년 1월 춘추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며, 6월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893년 7월 인천부사 겸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에 임명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일본공사 오토리 다이스케(大鳥圭介)가 3,000여 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입국을 요청하였다. 인천부사 겸 인천감리로서 “내 머리를 친다 해도 입국할 수 없다”라면서 끝까지 일본군의 입국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지시를 무시하고 무력을 앞세워 서울로 들어갔다. 이 군대는 (음)6월 24일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갑오변란(甲午變亂)을 일으켰다. 이에 일본군의 무력 진입을 막지 못하자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일본 공사의 요구에 의해 인천감리직에서 파직되었다. 그로부터 7일 후인 9월 10일에 인천 영사는 일본 공사에게 인천부사직마저 파직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 이유는 영국 영사와 세관 관리, 그리고 ‘청국당(淸國黨)’과 접촉하여 적국인 청나라에 도움을 청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음)9월 12일 인천부사직마저 파직되고, (음)10월 11일 궁내부참의로 전보되었다. 1896년 2월 홍주관찰사 이승우의 후임으로 홍주부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896년 1월 김복한(金福漢) 등이 홍주의병(洪州義兵)을 일으켰는데, 관찰사 이승우가 비록 의병을 배신했지만, 처음에 의병에 동참했다 하여 해직되었다. 그러나 이승우의 후임으로 홍주부 관찰사에 부임하여 오히려 홍주의병을 석방하였다. 이 일로 같은 해 5월 관직에서 해임되고, 6월에 전라도 지도군(智島郡) 고군산도(古群山島)로 2년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8월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 후 낙향하여 향리인 보령 천북면 용천에 강당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강당의 옆에 천일대(天一臺)를 쌓고 매일 서울을 향해 재배하면서 자정(自靖)의 생활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5년 (음)11월 25일 민종식(閔宗植)과 함께 상경하였다. 상소를 올려 을사늑약의 철회와 을사오적의 처벌을 주청하고자 한 것이다. 이때 김복한과 이설도 상경하여 상소를 올렸으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민종식과 그는 상소를 올리기 전에 김복한 등의 체포 소식을 듣고 상소를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민종식은 다음 해인 1906년 3월 안병찬(安炳瓚) 등의 추대로 예산(禮山)의 광시(光市)에서 홍주의병장에 올랐다. 홍주의병은 홍주성을 공격하고, 청양(靑陽)의 화성(化城)에서 합천(合川)전투를 치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급습으로 패산하였다. 민종식은 이용규(李容珪)의 모군에 힘입어 5월 9일 부여(扶餘)의 지치에서 재봉기하였다. 홍주의병은 남포(藍浦) 전투에서 승리하고 5월 20일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의병에 합류하였고, 민종식이 새로 조직한 편제에 군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일본군은 5월 20일부터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의병은 굳건한 성벽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5월 21일에도 일본군이 공격하였으나, 일본 순사 사다케(佐竹)가 부상당하여 서울로 호송되었다. 5월 27일에는 경부 히지카타土方源之助 등 일본인 3명과 일진회원(一進會員) 2명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일본군의 연이은 패퇴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보병 제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 지휘하에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가 합세하여 5월 30일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결국 31일 새벽에 홍주성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의병은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나 30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패산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민가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같은 해 11월 10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고군산도에 유배되었다. 재판정에서 그동안의 의병 활동과 자진하여 체포된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는 불행하게도 지난해 10월에 새 조약의 변을 당하여 쓰리고 아픈 마음을 금치 못하여 곧장 자결하려고 한 것이 오래였습니다. 올해 4월에 전 참판 민종식이 일본을 반대하는 뜻으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에 들어왔는데, 죽기를 맹세하고 나라에 보답하자는 내용으로 신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어서 즉시 가보았으나 신은 병들고 못나서 본래 의병이 될 역량이 없어서 단지 한번 죽기를 맹세했을 뿐입니다. 얼마 후 그 무리들이 흩어지자 저는 난민들에게 밀려나 성밖으로 나가 여기저기 숨어 다녔는데, 하루를 사는 것이 하루의 욕을 보는 것이었으므로 본원에 자수하였습니다. 폐하에게 보고되어 속히 처단을 받음으로써 일본 감옥의 귀신이 되는 것을 면하도록 해주신다면 신은 죽어서 영예를 얻을 뿐 아니라 실로 나라의 체모가 바로잡히게 될 것입니다(『고종실록』, 고종43년 1906년 10월 25일자). 이때 제자 최상하가 그의 체포 소식을 듣고 홀로 편히 있을 수 없다면서 함께 갇혔다. 1906년에 사망하였다. 단 다른 자료에 따르면 1906년 9월에 유배 10년, 최상하는 유배 5년 형을 선고받았고, 제자 최상하와 함께 같은 해 11월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가 1907년 4월 최상화와 함께 석방되었다고 한다. 또, 석방된 후에는 보령 천북면 용천에서 ‘강호퇴사(江湖退士)’라 스스로 칭하고 자정의 생활을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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