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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濟寧

權濟

1850. 7. 18 ~ 1903.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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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權濟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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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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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2) 1850년 7월 18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명동(鳴洞)에서 권도수(權道銖)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신지로 서후면 보현동(甫峴洞, 현 耳開里)이 거론되기도 한다. 모친은 김성수(金聖洙)의 딸 의성(義城) 김씨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사문(士文)이고 호는 구산(龜山)이다. 부인 안동 장씨와 슬하에 6남 1녀를 두었다. 어려서부터 글솜씨가 뛰어나기로 유명하였으며, 가난한 환경에서도 공부에 힘을 쏟았고 남을 도울 때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종숙(宗叔) 청우(淸愚) 권택수(權宅銖)에게 한학을 배웠고, 외숙인 소와(素窩) 김봉화(金鳳和)에게 중용에 대한 문답을 통해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였다. 이후 안동의 대표적 유학자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문인 그룹인 정재학파(定齋學派)의 종장(宗匠)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의 문인이 되었다. 김흥락으로부터 ‘신명(信命)’ 두 자를 받고 평생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며, 이후에는 김도화를 찾아가 ‘입지(立志)’ 두 자를 받은 후 문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정재학파의 두 종장을 모두 스승으로 모시게 되면서 누구보다 강한 정체성을 지닌 정재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정재학파는 1896년 1월 안동의진(安東義陣)의 창의를 주도한 세력이고 그 중에도 김흥락과 김도화는 창의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김흥락은 1895년 말에 일어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강제 시행에 반발한 영남 유생을 대표하여 통문을 돌려 의병 창의에 앞장섰으며, 김도화는 안동의진의 의병장을 역임하였다. 1896년 1월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때 안동에서도 정재학파를 중심으로 한 안동의진이 조직되었다. 1월 17일 안동의 유생들은 창의를 논의한 끝에 그의 족숙(族叔)인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간부진을 편성하였는데, 이때 작성된 「안동의소파록(安東義所爬錄)」에 46명의 간부 명단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 그의 이름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자신의 문집인 『구산문집』과 이긍연의 『을미의병일기』에는 서기로 참여하여 직접 「8로(八路) 포고문」을 지어서 영남에 배포하였다고 하며, 그 전문이 실려 있다. 이 포고문을 읽은 선비들이 눈물을 머금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명문이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안동의진이 형성되는 초창기부터 중진으로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안동의진은 창의 후 1월 23일 안동부를 점령하고 격문을 발표하여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월 29일 풍산에서 맞붙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그 결과 일본군과 관군이 안동에서 약탈과 의병 체포, 강제 단발 등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정황을 『의중일기』에 상세히 기록하여 당시의 참상을 알렸다. 그에 따르면 1월 31일부터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수백 명의 관군을 이끌고 무자비한 약탈을 일삼고 경무관·순검 등을 대동하여 강제 삭발을 자행하였다. 특히 김석중은 안동의 대표적 유림이자 유치명의 아들로 당시 70세가 넘은 유지호(柳止鎬)를 체포한 후 욕보이기도 하였으며, 직접 안동·선성·영천·의성 등지에서 선비들을 붙잡아 삭발을 자행하였다. 이에 안동은 물론 인근지역의 유림의 분노가 들끓어 안동의진에서도 재건을 도모하였고, 영남의 여러 읍에서도 다시 통문을 돌려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이에 영남의 연합의진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때 다시 서기로 발탁되어 안동의진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3월 26일 예천(醴泉)에서 모여 회맹(會盟)한 후 연합을 맹약하고 호좌의진의 서상렬(徐相烈)을 연합 의병장으로 선출하고 함창의 태봉 공략을 도모하였다. 3월 29일 영남의 7개 의진과 호좌의진은 연합 작전을 펼쳐 태봉의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화력의 열세와 조직적인 전투력의 부재로 인하여 연합 의진은 패전하였고 안동의진 역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때 안동의진은 중군장 권재호가 인솔하여 참전하였는데 패배 후 250여 명의 병력이 60여 명으로 줄어든 채 본진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때 옹천에서 진을 치고 있던 안동의진은 서기였던 그와 정필화(鄭弼和)를 불러 포군(砲軍)과 창군(槍軍)을 모집하게 하였다. 이후 서기들은 전령(傳令)이 되어 의진 재건을 위해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병력을 모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들은 향회(鄕會)를 돌아다니며 의진 재건을 위해 힘썼고, 영남 지역의 흩어진 의병을 모아 안동의진과 규합하게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김도화가 이끌었던 안동의진은 태봉 전투 패배 이후 병력이 흩어졌고, 7월에 이르러 해산의 수순을 밟았다. 의진 해산 이후 만년에는 주역(周易)에 심취하여 주역의 64괘와 음양학에 힘썼다고 한다. 학문적 식견이 높아 『구산문집(龜山文集)』과 을미의병기 안동의진의 활동상을 상세히 기록한 『의중일기(義中日記)』를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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