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호
金德鎬미상 ~ 1907. 11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출생지나 출생 연월일에 대해서는 확인할 자료가 없다. 주요 활동 지역이 강원도 양구(楊口)였던 것으로 보아 양구나 그 인근 지역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동료 김규설(金圭卨) 등과 함께 항일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강원도 양구는 1896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결성된 호좌의병부대가 활약한 지역이다. 화서학파의 대표인 유인석은 유생들을 중심으로 ‘국수보복(國讐報復)’과 ‘근왕창의(勤王倡義)’를 기치로 거의하였다. 특히 호좌의병부대에는 지평 출신의 김백선(金伯先)을 중심으로 한 포군(砲軍)까지 합세하면서 강력한 군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전열을 정비한 호좌의병부대는 서북대행군을 진행하였다. 이때 양구 지역을 거쳐 가게 되었다. 이는 당시 양구에서 개별적으로 거의하여 활동하던 의병과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후기 의병의 결성과 활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07년 한일신협약과 함께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국권 상실이 현실화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나 구국운동을 전개해갔다. 특히 군대해산 이후에는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평민들 주도로 의병부대가 결성되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여졌다. 강원도에서도 춘천과 원주·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부대가 결성되었다. 양구에서도 1907년 보부상 출신 최도환(崔道煥, 1851~1911)이 의병 200여 명을 결성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최도환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강원도 양구와 경기도 일대에서 일본군에 타격을 주는 등 용맹을 떨치고 있었다. 1907년 12월 일본군에 체포된 최도환 휘하 박래수의 심문조서에서 당시 최도환 부대의 화력은 일본총 3정, 화승총 40정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최도환은 자신을 따르는 의병들에게 “일본인들이 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는 것이 나라를 위한 행동”이라며 독려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907년 일본군과 치룬 수차례의 전투에서 사상자와 체포자가 다수 속출하면서 일시 해산 후 은둔하였다. 양구 지역에서 김규설(金圭卨)과 같이 별도의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양구와 홍천을 오가며, 주로 험준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일본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1907년 11월 김규설을 비롯한 동료 의병 수십 명과 함께 양구군 선안리(善安里)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둔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11월 25일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대를 파견하여 기습·공격하였다.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인해 의병부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동료 김규설 및 부장 3명 등 10여 명의 의병이 전사하였으며, 여러 의병이 체포되었는데, 이때 일본군과의 교전 과정에서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당시 일제는 의병의 소굴이라 하여 인근 마을 민가 30채를 불태웠다. 1978년 11월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공리와 석현리 경계지점의 실학고개 정상에 유인석의 의병 활동과 최도환을 비롯한 양구 의병들의 항일 의병 활동을 기념하고자 ‘항일의병전적비’를 건립하였다. 전적비에는 “방산과 양구, 양구와 춘천, 그리고 양구와 문등으로 연결된 교통로는 혈전(血戰)의 길목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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