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낙삼

金洛三

1877 ~ 1908. 6. 13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낙삼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미상의병

포상 정보

  • · 애국장(2005)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5) 1877년경 태어났다. 출신지는 알 수 없으나 자라서는 충청남도 당진군(唐津郡) 상대면(上大面) 중흥리(中興里, 현 당진시 고대면 항곡리)에 거주하였다. 의병 활동에 직접 나섰던 시기는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고종)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연이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군대도 강제해산되면서 일제에 대한 전국적 저항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당진 지역에서도 을사늑약 이후 의병이 일어났다. 면천군 매염리(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출신의 최구현은 군부참서관으로 있었는데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이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을사늑약을 지켜본 최구현은 1906년 4월 기지시에 ‘병오창의도소’를 설치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면천·당진·고덕·천의·여미 등지에 격문을 발표하고 37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창의영도장’에 추대되었다. 최구현은 1906년 5월 10일 면천성을 공격하는 등 활약하였으나 일본 경찰대의 대대적인 기습공격을 받고 체포되어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그 외에도 당진 사람으로 홍주의병에 가담 홍주성 전투를 치른 이민식과 맹달섭 등도 충남을 근거로 의병 운동을 지속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봉기한 정주원 의병도 충남 지역을 대표하는 의병부대 가운데 하나였다. 당진에서는 이처럼 일본의 국권 침탈에 저항한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08년 6월 13일 당진주재소 한인 순사 전재길에게 당진시장에서 불심 검문을 당하고 의병 혐의로 하여 붙잡혀 당진주재소에서 심문을 받았다. 심문 결과 1908년 5월 중순에 천도교 회원 박횡좌(朴潢佐) 외 3명을 처단하고, 당진주재소를 방화·파괴하는 등의 활동에 참가한 것이 밝혀졌다. 박횡좌(朴潢佐) 등을 죽이고 당진주재소를 파괴하는 활동은 1908년 5월 18일 있었다. 의병 20여 명이 5월 18일 당진군 남면 발산동의 박회좌 집에 들어가 박횡좌 등 가족 4명을 죽이고, 당진주재소와 군 주사 집을 공격하여 방화, 소실시킨 일이 있었다. 이 활동은 당진의병장 정주원 부대의 활동으로 보인다. 이렇게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1908년 6월 13일 붙잡혀 당진주재소에서 심문을 받았다. 이때 면천헌병분견소 소속 헌병 3명이 주재소에 와서 인계를 요구함에 이를 승낙하였다. 일본 헌병의 심문을 받은 뒤 재판도 없이 당진읍내에서 총살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곽금선⋮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