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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金尙沃

1892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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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상옥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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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義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의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천마산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2)

관련 사건

  • · 의주 옥상경찰주재소 및 면사무소 습격
  • · 초산 도원면 경찰주재소 및 면사무소 습격
  • · 윤창룡
  • · 박춘근 등 변절자 처단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2) 1892년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고령삭면(古寧朔面) 동고동(東古洞)에서 출생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침략자 일제를 물리치려고 고심하다가 1920년 3월 뜻이 맞는 동지들과 힘을 합해 고령삭면에 위치한 천마산(天摩山)을 근거지로 한 천마산대를 조직하였다. 조직을 주도한 사람은 같은 고향 출신으로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최시흥(崔時興)이었다. 천마산대의 지휘체제는 사령장 최시흥, 부관 최지풍(崔志豊), 참모 박응백(朴應伯)·박영찬(朴泳燦)·최윤희(崔允熙), 경리 김세진(金世鎭), 중대장 최의집(崔義輯), 김용택(金龍澤)과 함께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체제가 계속 이어진 것은 아니고 간부가 교체된 경우도 있었으며, 대원은 40명에서 많을 때는 200명까지 이를 때도 있었다. 이 천마산대는 서간도(西間島) 콴뎬현(寬甸縣)에 근거지를 가진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과 연계하며 그 별영(別營)으로 활동하였다. 재만 독립군단(獨立軍團)이 일시적으로 파견하는 유격대가 아니라, 국내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지원을 받아가며 장기간 무장 활동을 이어 간 별동대였다. 성립되고 3개월을 조금 넘긴 1920년 6월 20일 대원 17명으로 전투 조를 구성하였다. 이들을 이끌고 의주군 옥상면(玉尙面)으로 진입해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동시에 기습 공격하였다. 주재소 습격으로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하였고, 작전 마지막에는 두 곳에 불을 놓아 소각시켰다. 이어 같은 해 7월에는 초산군(楚山郡) 판면(板面)에 있는 삼림간수소(森林看守所)를 습격해 경비들을 물리치고 엽총과 도검, 망원경 등을 전리품으로 회수하였다. 같은 7월, 16명으로 전투대를 구성해 창성군(昌城郡) 대유동(大楡洞)에 있는 일제의 경찰주재소와 우편소를 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는 여섯 자루의 장총과 두 자루의 칼을 전리품으로 획득하였다. 대원들을 인솔해 일제 침략기관을 척결하는 이 같은 작전은 해를 넘기면서도 이어졌다. 1921년 9월에는 대원 15명을 이끌고 초산군 도원면(桃源面)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경찰주재소에서는 한인 순사 김도휘(金燾徽)를 처단하고, 면사무소에서는 면장과 그 동생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장총 3정과 탄환 100발, 도검 네 자루와 현금 100원을 군자금으로 모금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방화해 태운 뒤 철수하였다. 일제는 평북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병력의 군경대를 풀어 천마산대 대원들을 체포하고자 했다. 활동 중 몇 명의 대원이 체포되고, 1921년에는 본부인 광복군총영의 지원도 원활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천마산대의 이 같은 활동을 비롯한 독립군의 국내 진입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일제는 1920년 10월 약 2만 명의 일본군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서북간도 독립군 근거지를 초토화하려는 것이었다.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진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불리는 일본군의 만행이 시작되자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북만주(北滿洲)의 미산(密山)을 거쳐 소련 연해주로 이동했고, 일부는 근거지를 떠나 주변의 산간오지로 옮겼다. 때문에 광복군총영도 천마산대를 지원하기 어려웠다. 국내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1922년 대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에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대원이 되었다. 통의부는 1922년 8월 경신참변 후 흐트러진 독립군 진영을 정비하려고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의 17개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해 성립한 독립군단이다. 경신참변 시 독립군의 근거지만 파괴된 것이 아니라 이주 한인 사회도 초토화되어 힘을 합해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통의부는 남만 지역 한인 사회를 복원하고, 구성원들의 삶을 이끌기 위한 자치조직을 설치하고 침략자 일제와 전투를 벌일 의용군을 편성하였다. 설립 초기 간부진은 조직을 대표하는 총장은 김동삼(金東三)이었고, 그 밑에 재무·법무·교통·군사·민사·교섭·학무·실업 등의 부서를 설치해 자치를 담당토록 하고, 김창환(金昌煥)을 사령관으로 한 의용군을 편성하였다. 5개 중대 및 유격대로 구성된 통의부 의용군은 제3중대를 제외한 4개 중대 밑에 3개 소대가 설치되었다. 제3중대는 국내에서 넘어 온 천마산대 대원들로 구성된 중대였다. 의용군내 하나의 중대로 편성되었지만, 다른 4개 중대의 편제와는 다르게 중대장은 외부가 알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임명되었으나, 하부 조직은 중대원이 아니면 모르도록 되어 있었다. 특수임무를 띤 특공대 같은 형식이었고, 주 임무 자체가 국내 진입 유격전이었다. 천마산대의 경험을 살려 오직 국내 항일전에만 투입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초기 중대장은 천마산대 대장 출신인 최시흥이었다. 그러나 최시흥은 얼마 후 일제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이후부터는 천마산대 간부로 있던 인물들이 3중대장직을 물려받았다. 처음에는 소대장 정도의 직책을 가졌다가 1924년 초에는 중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통일성을 지향했던 채찬 일행이 상하이에서 남만주로 돌아와 연락하자 그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1924년 4월 1일 의용군 제1·2·3 중대와 유격대 대표들이 남만주에서 거주하는 독립군을 포함한 모든 한인에게 ‘경고(警告) 남만군민(南滿軍民)’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발표하였다. 통의부에서 내분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이를 통제할 하나의 푯대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믿고 그 직할의 단체를 만들어 조국 광복에 매진하자는 내용이었다. 이 격문에 최지풍·박응백(朴應伯)·심용준(沈龍俊)·김용택(金龍澤) 등과 제3중대의 대표로 서명하였다. 이어 같은 4월에 채찬·최석순(崔碩淳)·장창헌(張昌憲)·김우근(金宇根) 등 30명과 남만주의 군인 대표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통일된 무장단체를 만들자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한 달 후인 5월에 또다시 3개 중대 대표들이 임시정부 기치 하에 모두 모이자는 선언서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도 3중대 대표로 서명하였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의용군 제1·2·3·5 중대와 유격대가 분리해 나와 1924년 중반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시켰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임시정부 직할의 육군이었다. 참의부는 항일 무장투쟁 우선의 노선을 가졌기에 국내로 진입하기 쉬운 압록강변의 지안현(輯安縣)에 본부를 설치하고, 주변의 환런(桓仁)·퉁화현(通化縣) 등에 중대와 소대 등을 분산 배치하였다. 참의부가 성립되자 지안현 고마령(古馬嶺)에 병영을 둔 제4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참의장 겸 제1중대장은 성립을 주도한 채찬이 맡았다. 참의부의 중대장에 임명된 후 더욱 적극적인 국내 진입전을 추진하였다. 직접 유격대를 인솔하고 압록강을 넘어 평북의 여러 지역에 다니며 일제의 침략 및 수탈기관들을 기습 공격하였다. 또 친일파를 처단하고 친일 부호들의 집을 습격해 많은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현창주(玄昌周)·이승옥(李承玉) 등 두 명의 부하와 배반자를 처단한 일이었다. 1927년 7월 무장을 갖춘 두 명의 부하와 참의부원이었다가 변절하여 친일의 무리에 가담한 윤창룡(尹昌龍)·박춘근(朴春根) 등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독립군 병영과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지안현 대위사하(大韋沙河)에 머무르며, 정보를 빼내 일제의 경찰과 연결된 중국 관헌에게 팔아넘겨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도 독립운동을 그만두고 일제에 협조할 듯 느끼게 해 두 변절자를 불러냈다. 그리고 변절자를 즉결 처분한다는 사형선고서를 낭독하고 현장에서 처단하였다. 일제의 퉁화현 영사관경찰대는 1928년 10월 18일부터 11월 8일까지 약 20일간 참의부 대원들에 대한 대대적 검거작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동지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 기간에 일제 경찰의 공격을 받고 순국한 대원도 상당수 있었다. 1932년 3월 3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재판 도중 일본인 판사가 직업을 묻자, “농사하고 장사하다가 독립운동을 하였소”라고 꾸짖듯 답했다. 이에 판사가 “독립운동은 무슨 독립운동이야?”하고 상한 기분을 내보이며 되묻자, “한국 독립운동이지 무슨 독립운동이란 말이오?”라고 조국 독립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친 장부답게 당당하게 소리쳐 비웃듯 답했다. 재판 후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옥중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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