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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국

金鳳國

1890. 9. 20 ~ 1932.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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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봉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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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성천(成川)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성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천도교청년회 성천지회
  • · 천도교연합회
  • · 고려혁명위원회
  • · 고려혁명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1924년 언론집회압박탄압회 참여
  • · 1926년 고려혁명당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0년 9월 20일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 삼흥면(三興面) 일청리(一淸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소소(素笑), 김이소 등으로 불렸다. 17세가 될 때까지 한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천도교 교리강습소에 다니며 신학문을 익혔다. 1916년에 천도교 성천교구에서 금융원으로 일하였다. 1919년 3월 4일 천도교 성천 교구장인 이돈하(李敦夏)의 주도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는 일을 맡았다. 1919년 9월 2일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가 설립되자 1920년 2월 성천지부를 설립하고 지부장으로서 신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4월 25일에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가 천도교청년회로 개편되자 곧바로 성천지회를 설립하고 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아들인 최동희(崔東羲)가 주도한 천도교 혁신 운동에 가담하였다. 혁신 운동을 둘러싸고 천도교 지도부가 혁신파와 보수파로 나뉘자, 혁신파를 대표하는 소장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천도교인이 직접 투표를 통해 대의 기구인 의정회의 의정원(議正員)을 선출할 때, 성천을 대표하는 의정원에 당선되었다. 1921년 12월 10일에 처음 열린 의정회에서는 혁신파를 대표한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의정회가 교주 선거제 등의 혁신적 내용을 담은 천도교 종헌(天道敎 宗憲)을 제정할 때는 기초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천도교 종헌에 따라 만든 대의 기구인 종의원의 종의사(宗義師)에도 선출되었다. 종의원에서도 혁신파를 대표한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교주 박인호(朴寅浩)가 중앙 교단에 상주하지 못하도록 하자 교주 퇴진 운동을 벌였다. 결국 보수파의 표적이 되어 제명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1922년 5월 천도교를 이끌던 손병희(孫秉熙)가 사망한 후 보수파가 교주제 폐지를 카드로 혁신파와 타협하면서 복권되었다. 하지만 최린(崔麟),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등이 이끄는 보수파에 계속 밀린 혁신파는 1922년 12월 천도교연합회를 창설해 천도교단을 이탈하였다. 혁신파는 천도교 혁신 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922년 7월 최동희의 주도로 고려혁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등 천도교 혁신파가 주축이 되어 만든 고려혁명위원회에 국내 선전부장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10월 9일 천도교청년회와는 별도로 혁신파 소장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유신청년회가 출범하면서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천도교 혁신 운동을 이끄는 소장 지도자로 널리 알려지면서 사회 운동에서도 주요 역할을 맡았다. 1924년 6월 조선총독부의 언론과 집회에 대한 탄압에 항의하는 ‘언론집회압박탄핵회’가 만들어질 때 13명의 실행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3월 천도교 혁신파인 이동구(李東求), 천도교 혁신파이자 형평사 혁신동맹계 간부인 이동락(李東洛)과 함께 최동희의 민족유일당 참여를 위해 지린(吉林)으로 건너갔다. 민족유일당에는 국내 천도교 혁신파와 형평사의 간부들과 함께 만주의 정의부 간부, 연해주에서 건너온 이규풍(李奎豊), 김광희(金光熙) 등이 가담하였다. 이들은 무장 투쟁과 외교 공작을 추진할 민족유일당의 이름을 고려혁명당으로 정하였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4월 5일, 즉 천도교의 천일기념일에 정식 결성되었다. 양기탁이 위원장, 이동구가 책임비서를 맡은 초기 간부진에서 15명의 위원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고려혁명당이 결성된 무렵부터 천도교 혁신파인 오지영(吳知泳)과 함께 천도교인의 만주 이주와 자치촌 건설을 추진하였다. 오지영의 활동 거점이던 전북 익산의 천도교연합회원 230명과 평남 성천의 천도교연합회원 27명이 지린으로 이주해 농장을 경영하였다. 만주와 성천을 오가며 만주 이주와 자치촌 건설 운동을 하던 중 1926년 9월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다닌다며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검사는 징역 1년 형을 구형했으나, 12월 무죄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동락이 12월 28일에 전격 체포되면서 고려혁명당이 발각된 후, 1927년 1월 만주 펑톈(奉天)에서 붙잡혔다. 1927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 형을 선고받았다. 곧바로 항소하여 1928년 10월 평양복심법원에서 5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신의주형무소에 복역하던 중 1929년 9월경 발병하여 병감(病監)에서 지내다가 1932년 1월 5일에 출옥하였다. 석 달 후인 4월 20일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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