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하
金德河1898. 10. 25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보합단
포상 정보
- · 애국장(2011)
관련 사건
- · 1920년 9월 평북 친일순사 처단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1) 1898년 10월 25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비현면(枇峴面) 정산동(停山洞)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김중량(金仲亮, 이명 金時璜)은 서당의 훈장으로 학문에 조예가 깊은 데다 민족정신도 강한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학문과 함께 애국심도 배우며 성장하였다. 1920년 5월 재만(在滿) 독립군단(獨立軍團)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소속 김동식(金東植, 이명 김유신(金攸信))이 김중량을 찾아왔다. 김동식은 국내로 들어와 이미 3월에 의주군 월화면(月華面)에서 동지를 규합해 조선청년회결사대(朝鮮靑年會決死隊)를 조직하고 나서 김중량을 찾아온 것이다. 두 사람은 즉시 의기투합해 조선청년회결사대를 확대해 보합단(普合團)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김중량이 부단장이 되었다. 부친이 이끄는 독립운동 조직에 동참하고자 동생인 김태하(金泰河)와 함께 단원이 되었다. 직책은 재무원(財務員)이었다. 김중량을 따르는 다수 청년의 가입으로 구성원은 2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보합단의 주요 활동은 군자금모금, 친일 부일배 및 일본인 군경의 처단, 식민통치기구 습격 등이었다. 그러나 가장 역점을 둔 활동은 많은 군자금을 모집해 상하이(上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내는 것이었다. 보합단은 정산동 뒷산의 암굴을 본부로 정하고, 등사기를 구해 경고문·군자금영수증·입단증·단칙(團則) 등을 인쇄하였다. 단칙을 제정하고 임원을 선출하며 조직을 새로이 정비한 보합단은 6월 초순 본부를 의주군 고관면(古舘面) 동암동(東岩洞)의 비교적 험난한 산세를 가진 지역으로 옮겼다. 그리고 9월에는 선천군(宣川郡) 산면(山面) 내산동(內山洞)에 있는 진광사(晋光寺)라는 사찰로 본부를 정하였다. 본부가 안정되자 보합단의 단원들을 2개의 행동조로 나누었다. 재무부장을 맡은 백운기(白雲起)를 비롯해 김태하·한이경(韓理景)·김용준(金用俊)·한우종(韓禹種)·이동원(李東元)이 한 조를 이루고, 부친과 함께 나머지 인원과 한 조가 되었다. 같은 조의 단원들과 함께 1920년 9월 하순 진광사의 본부로 출발하였다. 목표는 비현면 정산동에 거주하는 한국인 순사 문치무(文致武)를 처단하는 것이었다. 문치무는 일제의 앞잡이 순사로서 마을 사람들을 혹독하게 괴롭히고 재물을 탈취한 자였다. 9월 28일 밤 11시경 문치무의 집을 급습하여 그를 처단하고, 친일파의 집을 소각하였으며, 아버지의 세력을 믿고 그 못지않게 마을 사람들에게 패악질을 일삼은 아들 문덕우(文德友)도 함께 처단하였다. 같은 달 30일에 두 개 조를 합해 20여 명의 행동대를 구성해 철산군(鐵山郡) 참면(站面) 이응동(二應洞)의 부호(富豪) 오희원(吳熙源)의 집으로 갔다. 행동대는 오희원을 꿇어앉히고 5,000원의 군자금을 청구했지만, 당장 돈이 없다고 다음 기회를 약속하였으므로 엽총과 탄환, 금시계만을 받고 철수하였다. 보합단의 단원들의 이 같은 과감한 작전은, 일제 당국에 신고된 건수만 82회였다. 그리고 이들 작전에서 갹출한 군자금은 2만 원이 넘는 액수였다. 이 수합된 군자금은 김동식이 서간도(西間島)의 대한독립단으로 보내, 임시정부로 전달되도록 하였다. 보합단 단원들의 군자금 모집과 친일 주구 처단 활동을 이어지자 일제 경찰은 수십 개의 수색대를 구성해 평북 일대를 추적해왔다. 10월 2일 진광사 본부에 머물러 있던 보합단 단원들은 일제 경찰대의 습격으로 일대 격전을 벌였다. 이동원·김응초(金應焦) 등 두 명의 단원이 현장에서 전사하였다. 부친 김중량도 부상을 입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단원들과 서둘러 퇴각하던 중 백운기와 단원들의 의료를 책임졌던 박세정(朴世正)이 붙잡히고 말았다. 단원들과 부상당한 부친을 부축해 즉시 압록강을 넘어 그해 11월경 서간도의 콴뎬현(寬甸縣) 모전자(毛甸子)로 피신하였다. 전사 2명, 체포 2명의 손실을 입었지만 보합단은 콴뎬현에서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다. 1921년 초, 서간도로 옮겨와 새롭게 진영을 갖춘 보합단의 단장은 부친 김중량이 맡았다. 그런데 이 시기 보합단이 옮겨간 서간도 및 두만강변 북간도(北間島) 지역에 근거지를 구축한 독립군과 이주 한인 사회는 큰 수난을 겪고 있었다. 3·1운동 후 서북간도 지역에 성립된 수십 개 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의 활동으로 큰 피해를 본 일제는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6개월간 약 2만 명의 대병력으로 이 지역에 침입하였다. 이른바 일제가 자행한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으로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침략자들은 독립군기지와 한인 마을 모든 곳을 파괴하고 살인과 방화를 자행해 전 지역을 폐허로 만들었다. 독립군의 큰 줄기는 일시적 피전책(避戰策)을 택해 북만주(北滿洲)를 거쳐 소련의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근거지에 남아 있던 병력들도 산간오지로 피신해 일시적 위기를 모면하였다. 상황이 이와 같았기에 국내에서 이동해 온 보합단 단원들 또한 항일 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기 어려웠다. 이에 재만 독립군단으로 거듭난 보합단은 얼마가지 않아 대한독립단으로 통합되었다. 일본군이 물러간 후, 1921년 하반기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의 독립운동 단체 지도자들은 독립군 기지를 재건하고 한인 사회를 복원하기 위한 통합 운동을 벌였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통합을 적극적으로 이끌고자 1922년 1월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결성하고, 그 후원대를 만들었다. 이 후원대의 일원이 되어 통합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이 같은 노력으로 1922년 초, 광한단(光韓團)을 비롯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및 대한독립단 일부가 통합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까지 통합 운동을 이끌어 8월에 남만주 17개 단체가 통합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통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항은 밝혀지나 이후 만주에서의 활동 사항은 자료의 한계로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1930년 초까지 만주에 머무르며 활동하다가 1930년 4월 23일,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들어오다 일제의 신의주경찰대에 붙잡혔다. 1932년 4월 2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평양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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