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윤
金德潤1894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무정단
포상 정보
- · 애국장(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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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5)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상가면(上加面) 판봉동(板峯洞) 출신이며, 1925년 당시 32세인 점으로 미루어 1894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1년 7월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고국을 떠나 간도와 러시아령에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1923년 (음)3월 결성된 무정단(武政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일제는 1920년 10월 만주의 독립군을 소멸시키고자 한국에 주둔한 19사단을 중심으로 대규모 일본군을 투입하는 대토벌을 벌였다. 이에 북간도의 대한군정서·대한독립군·대한국민군·대한신민회·혈성단·군무도독부 등 대다수 독립군단은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북만주 밀산(密山)으로 향하였고, 일부는 백두산 방면으로 향하였다. 밀산에 집결한 독립군단들은 일제와의 장기 항전에 대비하기 위해 러시아령 연해주로 가기로 하였다. 1921년 1월 초 국경을 넘어 연해주 이만을 거쳐 3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북간도의 독립군은 러시아 적군과 함께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군에 저항하였던 한인 빨치산부대와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총사령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이후 대한의용군의 주도권을 두고 이르쿠츠크 조선공산당파가 주도하는 고려혁명군과 대한의용군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문제로 그해 6월 28일 고려혁명군이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공격하는 ‘자유시참변’이 일어났다. 이 참극으로 수많은 동지를 잃은 독립군은 다시 북만주로 돌아가는 등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와중에 1923년 (음)3월 혈성단원 조경화(趙京化)·유창협(柳昌協) 등이 자유시참변에서 살아남은 혈성단원, 대한의군단원 등을 규합하여 무정단을 조직하였다. 무정단은 1923년 (음)5월 중순 지린성(吉林省) 안투현(安圖縣)으로 이동하여 광복단 등 다른 독립군단과 연합하여 국내에 들어가 일제 관공서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하기로 계획하였다. 무정단원 30여 명은 (음)7월 초순 안투현 흥도자(興道子)에 도착하였으나, 이곳 보위단의 방해를 받아 부득이 후일을 약속하고 일시 부대를 나누어 활동하였다. 서창무(徐昌務)·박창환(朴昌煥)·김병구(金炳九)·이용준(李容俊) 등과 함께 무정단 제1대에 소속되었다. 부대원들과 함께 옌지현(延吉縣)으로 들어와 수신향(守信鄕) 서고성자(西古城子) 이승필(李承弼)과 용지향(勇智鄕) 동판자구(東板子溝) 박관섭(朴寬爕)의 집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옌지, 허룽(和龍) 양현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3년 (음)12월 4일 서창무·박창환·김병구 등과 같이 허룽현 황직동(黃稷洞) 백호장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4년 1월 12일 밤 옌지현 수신사 대팔포강(大八浦江) 회령촌(會寧村)에서 상하이(上海) 독립신문특파원 김용구가 동민들을 대상으로 독립신문, 경고문 등을 보이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월 15일 밤 수신사 대팔포강 장공칠(張公七)의 집에서, 1월 18일 밤 대팔포강 신흥촌(新興村) 방경률(方京律)의 집에서 각각 동민을 모아놓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그해 2월 초순 훈춘(琿春) 일본영사관분관 경찰에 붙잡혔다. 1924년 9월 29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및 강도죄로 징역 8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5년 1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7년 2월 7일 칙령 제12호에 의해 징역 6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다시 1928년 칙령 제270호에 의해 다시 징역 4년 10월 24일로 감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윤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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