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덕산
郭德山1875. 1. 13 ~ 1959. 3.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0)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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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0) 1875년 1월 13일 경상북도 청하군(淸河郡) 남면(南面) 고현동(古縣洞)에서 충익공(忠翼公) 곽재우(郭再祐)의 후예로 태어났다. 고현동은 현재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고현리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이명은 곽덕윤(郭德允), 혹은 곽중영(郭重泳)이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의 강제 퇴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강제 체결,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이른바 후기 의병이라 칭해하는 의병들은 일제와의 직접적인 전투뿐만 아니라 군수금 징발, 친일파 처단, 양반 토호 징벌 등의 활동도 동시에 추진하였다. 이 무렵 김봉조(金鳳祚)·곽이조(郭二祚) 등과 함께 흥해(興海) 지역 일대에서 군수품 조달 임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당시 경북 지방 영천(永川)·흥해·청하 일대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의병부대가 정환직(鄭煥直)·정용기(鄭鏞基) 부자가 이끈 산남의진(山南義陣)이었으므로 산남의진 소속 의병으로 추정된다. 다만, 김봉조·곽이조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펴던 시기는 1907년 (음)11월 4일 정환직 의병장이 의병부대의 근거지였던 북동대산에서 병사들에게 ‘개별적으로 식량과 복장 및 탄약을 구해 관동(關東)으로 들어오라’라고 지시하고 부대를 해산한 직후였다. 이에 군자금 징수 활동으로 그해 (음)11월 11일 밤 흥해군 북하면(北下面) 도항동(島項洞), 곧 현재의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오도리(烏島里)의 박곡강(朴曲江)의 집에 가서 “우리는 의병이다. 군수금 징발을 위해서 왔다”라고 하면서 군수금 제공을 요청하여 50원을 모금하였다. 이틀 뒤인 (음)11월 13일 밤에는 흥해군 북상면(北上面) 벌제동(伐提洞), 곧 지금의 포항시 북구 흥해읍 용천리(龍泉里)에 사는 부호(富豪) 고낙삼(高洛三)의 집으로 찾아가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돈이 없어 2~3일 뒤에 받기로 약속하고 돌아왔다가 다시 찾아가 군자금 100원을 징수하였다. 또 11월 23일 밤에는 흥해군 북하면 흥안동(興安洞), 현재의 포항시 북구 흥해읍 흥안리(興安里)에 사는 오토성(吳土城)의 집에 찾아가 ‘우리는 의병’이라고 하고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당시 가진 돈이 없어 4~5일의 여유를 주고 물러났다가 약속한 날 다시 찾아가 군자금 30원을 수령하였다. 1908년 2월 16일 새벽에는 흥해군 북하면 백암동(白岩洞)에 사는 권기한(權紀翰)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가 주찬(酒饌)만 대접받고 나왔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잡혀 1908년 8월 19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감형과 가출옥 처분을 받아 1913년 6월 28일 대구감옥에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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