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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金升玉

1889. 5. 28 ~ 1964.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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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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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高敞)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고창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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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고창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89년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고창면(高敞面) 읍내리(邑內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일우(一愚)로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9년 당시 고창군 고창면(高敞面)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면서기로 재직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고창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3월 14일에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창가」, 「국민휘보(國民彙報)」 등의 인쇄물을 구하였다. 3월 17일 밤 고창면사무소에서 사무소의 등사기를 이용해 독립선언서 7~8장과 「조선독립창가」 약 50여 장을 인쇄하였다. 면사무소에서 오동균(吳東均)에게 인쇄물을 나누어 주고 읍내의 몇몇 유지와 학생들에게 연락하여 동참을 호소하였다. 거사 일은 고창의 장날인 3월 19일로 잡았다. 하지만 이날 시위는 준비 부족과 일제 경찰의 감시로 성사되지 못하여 3월 21일로 연기되었다. 3월 21일 오전 11시 고창면사무소 앞에 1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모아놓고 독립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역설하고, 선두에 서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5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고창군청으로 몰려가 고창군수와 군청 직원들에게 만세 시위에 동참하라고 요구하였다. 긴급 출동한 일제 경찰과 헌병대의 무력 진압으로 시위대가 강제해산되는 과정에서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3일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1921년에는 고창노동친목회(高敞勞働親睦會)에 참여하였고 1922년부터는 고창청년회(高敞靑年會)에서 활약하여 1926년부터 1929년까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고창 출신 도쿄 유학생을 돕기 위한 구제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1925년에는 기근강연회 연사로도 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한국 농촌의 계발과 문맹 퇴치를 목표로 한 조선농인사(朝鮮農人社)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35년과 1938~39년 고창고등보통학교(고창중학교) 평의원을, 1937년 중앙일보 고창지국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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