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金聖根1885. 11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3)
관련 사건
- · 비안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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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3) 1885년 11월경 경상북도 군위군(軍威郡) 소보면(召保面) 위성동(渭城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에는 35세로 비안면(比安面) 서부동(西部洞)에서 거주하였으며, 일용직으로 생계를 꾸린 것으로 보인다. 의성군의 만세 시위는 1919년 3월 12일에 비안면에서 시작된 후 23일에 걸쳐 총 7개 면에서 21차례 일어났다. 의성군에서 처음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은 비안공립보통학교 뒷산이었다. 비안공립보통학교의 상급생이던 박만녕(朴萬寧) 등에 의한 당초 계획은 1919년 3월 11일에 학생들을 모아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키는 것이었지만, 경찰의 감시로 인해 이튿날로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주동자들을 퇴학시키겠다는 학교장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학생들은 3월 12일 오전 11시경 학교 뒷산에 올라 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다. 같은 날 쌍계동에서도 만세 시위가 있었다. 서울과 평양, 그리고 대구의 만세 시위 소식을 들은 쌍계교회의 박영화(朴永和) 목사는 3월 13일에 마을 주민들을 이끌어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다. 그러나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3월 12일에 만세 시위를 일으키고 마을로 돌아오자 곧바로 계획을 변경하여 당일에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2일의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쌍계동 주민들의 시위는 서부동 및 동부동 주민들의 운동 의지를 고조시켰다. 동부동에 사는 김석근(金碩根)은 당일 같은 마을의 임재호(林在虎)·박홍섭(朴洪燮)과 서부동의 박후도(朴後度)까지 함께 모여 궐기를 모의하였다. 이들은 120장의 태극기를 자체적으로 제작하여 3월 13일 밤에 서부동 우시장으로 향하였다. 김석근 등은 서부동 주민들이 다른 곳과는 달리 학교나 교회와 같은 조직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장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동원하고자 하였다. 당시 시장에는 40~50명의 주민이 모여 있었다. 김석근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 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서부동 시장의 만세 시위도 시작되었다. 이때 동부동 쪽에서도 군중이 합류하자 대열의 규모는 1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시장을 돌며 밤늦도록 만세를 외쳤지만, 경찰이 김석근을 체포하자 흩어지고 말았다. 이때 검거를 피한 임재호·박홍섭·박후도 등이 3월 16일의 비안 장날에 동부동에서 다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태(笞) 90도(度)의 처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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