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복
金夫卜1902. 6. 18 ~ 1954. 5. 2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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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2년 6월 18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대호지면(大湖芝面, 현 당진시) 적서리(赤鼠里)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919년 4월 4일 대호지면 및 정미면(貞美面) 천의장터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대호지면의 만세 운동은 도호의숙(桃湖義塾) 출신 유생들과 지역 유지, 대호지면사무소 직원들 및 천도교(天道敎) 세력이 연합하여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추진되었다.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인산(因山) 참례를 위해 서울로 상경한 도호의숙 출신의 남주원(南柱元)·이두하(李斗夏)·남계창(南啓昌)·남상직(南相直)·남상락(南相洛) 등 유생들은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전개된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대호지면에서도 만세 운동을 전개할 생각으로 탑골공원의 만세 운동에서 사용했던 태극기 1매와 독립선언서 1매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남주원 등의 유생들은 대호지면의 면장 이인정(李寅正) 및 민재봉(閔載鳳)·강태원(姜泰沅)·송재만(宋在萬)·김동운(金東云) 등 면사무소 직원들과 이춘응(李春應)·남상집(南相集)·김홍균(金烘均)·남정혁(南廷爀)·홍월성(洪月星) 등의 지역 유지, 백남덕(白南德)·홍순국(洪淳國) 등 천도교인(天道敎人)들에게 서울의 만세 운동 상황을 전하고 의견을 구하였다. 이들은 정미면 천의장날인 4월 4일에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자신의 거주 지역인 적서리의 연락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만세 운동의 실무는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면사무소 직원 송재만·김동운·강태원 등은 관내 도로 보수의 명분으로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면장 명의의 「도로수선병목정리(道路修繕並木整理)의 건」이라는 공문서를 작성하였다. 이인정 면장은 이 공문서를 각 마을의 구장(區長)들에게 발부하여 “4월 4일 면내 가호(家戶) 당 주민 1명씩 농기구를 지참하고 출석하여 도로 보수에 참여하라”라는 내용을 주민들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4월 3일에는 마을 훈장인 한운석(韓雲錫)에게 군중에게 배부할 애국가(愛國歌)를 만들도록 하여 면사무소에서 등사하였다. 4월 4일 아침 농기구를 지참한 약 600여 명의 주민들이 대호지면사무소 앞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인정이 나서 도로 보수는 위장된 목적이며 실제 목적은 독립 만세 운동임을 밝히고, 주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공감한 주민들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면사무소로부터 7킬로미터 떨어진 천의장터로 향하였다. 천의장터에서는 정미면의 주민까지 결합하여 시위대의 규모가 1,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더욱 사기가 올라 많은 군중과 함께 시장 곳곳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 운동을 진압하려는 천의주재소와 지원 나온 당진경찰서(唐津警察署)의 순사들이 당황하여 발포해 4명의 시위 참여자들이 부상당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천의주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 김길성(金吉成)·김찬용(金贊用)·원순봉(元順奉)·신태희(申泰熙)·이완하(李完夏) 등과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일제 순사를 구타하는 등 시위대의 선두에서 활동하였다. 주재소를 완전히 파괴한 후 다음의 제2차 거사를 기약하고 자진 해산하여 귀가하였다. 이날의 만세 운동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19년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소요, 출판법 위반, 공문서위조행사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당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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