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진
高石鎭1856. 1. 11 ~ 1924. 12.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파리장서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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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56년 1월 11일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정여(貞汝), 호는 수남(秀南)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과 거사를 도모하였다. 최익현이 이용원(李容元)·이도재(李道宰)·이성렬(李聖烈)·이남규(李南珪)·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 등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창의할 것을 호소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한탄하자, 함께 의병을 일으킬 믿을만한 인물로 임병찬(林炳瓚)을 추천하였다. 그 건의가 받아들여져 최익현과 임병찬의 제휴가 이루어졌다. 또한, 최익현이 태인에서 거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병찬은 호남의 유명 향리 출신으로 낙안군수를 역임한 데다 1894년 동학농민군 진압에도 기여한 점이 참작된 것이다. 이후 최제학(崔濟學)·이용길(李容吉) 등과 함께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군사를 모으고 무기를 마련하여 거의를 준비하였다. 1906년 5월 7일 최익현이 거의를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정산에서 출발하여 5월 8일 종성리(宗聖里)에 도착하자, 최학엽(崔學燁)·노병희(魯炳熹)·고제만(高濟萬) 등과 함께 의병을 맞이하였다. 당시 최익현 일행은 임현주(林顯周)·김경하(金敬河)·오상철(吳相喆), 임병찬의 아들 응철(應喆)과 손자 진(鎭) 등이었다. 5월 중순 민종식(閔宗植) 의병부대가 홍주성을 점령하자, 최익현은 봉기를 서둘렀다. 최익현은 창의를 알리는 상소를 올리고, 인근 지역에도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모집과 군기 수집에 전력을 기울였다. 5월 30일에는 최익현이 담양 추월산에서 기우만(奇宇萬)과 유생들을 만나 결의를 다지고 「동맹록」을 작성하자, 임병찬 등과 함께 연명하였다. 6월 4일 최익현이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강회를 하고 의병을 일으키자, 사생을 같이할 것을 다짐하고 80여 명의 지사와 함께 의병 대열에 합류하였다. 6월 5일 의병진이 정읍 한교(閑橋)에 이르러 100여 명을 모군하였다. 이때 김재구(金在龜)·강종회(姜鍾會)와 함께 전투력이 뛰어난 포군 30여 명을 모집하여 전력을 강화하였다. 의병진은 정읍을 점령한 후 구암사를 거쳐 7일 추격해온 일군을 물리치고 순창에 진을 쳤다. 그런데 6월 11일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조칙과 고시문이 도착하였다. 이후 의병 진압군인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가 의병진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최익현이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고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그는 20여 명과 함께 끝까지 남아 최익현을 호종하였다. 진위대의 공격으로 정시해(鄭時海)가 순국하고, 결국 붙잡혀 전주로 압송되었다. 다시 서울에 호송되어 일본군 사령부에서 가혹한 심문을 받고 4개월 형을 받았다. 이때 최익현은 3년, 임병찬은 2년간의 대마도 감금형을 선고받았다. 11월에 석방되어 그 직후인 12월 대마도에 가 최익현을 면회하였다. 1912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명을 받아 독립의군부를 결성하자, 참모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914년에는 독립의군부의 참모총장의 칙명을 받아 동지를 규합하고 전남과 전북의 조직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정체가 발각되어 독립의군부는 와해하였다. 1919년에는 다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각 지방 유림의 서명운동을 전개할 때 호남 유림들의 서명운동에 앞장섰다. 파리장서(巴里長書)에 137명 중의 한 명으로 서명하였다. 이후 향리에 돌아와 교육 사업에 열중하며 학생들의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데 열중하였다. 1924년 12월 26일 별세하였다. 유고집으로 『방호집(方壺集)』(3권2책, 1935)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서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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