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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태

金餠泰

1899. 1. 14 ~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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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병태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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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동래(東萊)의열투쟁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동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구세단
  • · 의열단
  • · 대한통의부
  • · 유악한국혁명청년회
  • ·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 · 민족혁명당
  • · 한국광복군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관련 사건

  • · 부산경찰서 폭탄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1899년 1월 14일 경상남도 동래부(東萊府) 좌천동(佐川洞)에서 태어나 자랐다. 김빈(金彬, 金斌), 혹은 조국동(曺國棟, 趙國東)이라는 이명을 썼다. 소년기에 부산 범천동(凡川洞)의 사립 육영학교(育英學校, 1911년 5월 부산진공립보통학교(釜山鎭公立普通學校)로 개편, 현 부산진초등학교)를 다녔고, 부산공립상업학교(釜山公立商業學校, 후일 부산상업고등학교로 변경되었다가 현 개성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1912년 최천택(崔天澤)·박재혁(朴載赫)·박흥규(朴興奎) 등과 함께 대한제국기의 보통교과용 국한문본 도서였던 현채(玄采)의 『동국역사(東國歷史)』를 등사기로 찍어서 학우들에게 몰래 나누어 주었다. 일제가 『동국역사』는 금서(禁書)로 묶어놓은 책이어서 3회 차 배부 때 경찰에 발각되어 요주의 인물로 지목받고 감시대상이 되었다. 1913년 최천택·박재혁·김인태(金仁泰, 이명 김철성(金鐵城)) 등 학우 16인과 함께 비밀결사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여 매월 한 차례 등사판의 단보(團報)를 내고, 경상남도 일원의 뜻있는 청년들에게 보내어 동지 규합을 도모하다 반년 만에 일제 경찰에 발각된 후 중지되었다. 1914년 김인태를 매개로 밀양의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와 기맥을 통하여 교류하였다. 1915년 3월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에 진학하여 정치경제과를 다녔다고 하며, 1917년 만주 훈춘(琿春)지방에서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고 있던 황병길(黃炳吉)을 만나보려고 최천택의 주선으로 장지형(張志亨)과 함께 북간도를 다녀왔다고도 한다. 1918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프랑스 조계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12월 국내 일제기관 총공격 거사용 폭탄을 구입코자 상하이로 온 김원봉(金元鳳)을 구세단 시절에 의형제 맺었던 인연으로 재회하고,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0년 4월 싱가포르의 인삼무역회사 직원으로 일하다 상하이로 온 박재혁을 김원봉과 만나도록 주선하여, 의열단에 가입한 박재혁이 동년 9월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에 나서는 데 일조하였다. 1923년 12월 '김빈(金斌)'이라는 가명으로 서간도의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군무부(부장 이천민(李天民)) 서기(書記)로 활동하였다. 이 해 여름에 의열단이 친일 장쭤린(張作霖) 정권이 관리하는 안봉선(安奉線) 철도 파괴와 연변 교란 등의 남만주 거사를 추진하면서 통의부에 연합행동을 제의하여 수락받았고, 이듬해 6월에도 통의부와의 합작에 의한 일본 내 거사를 추진하였다. 1922년경 상하이 시의 강만(江彎) 우쑹(呉淞) 방역의원장인 중국인 조모(曺某)의 양자가 되어, 그의 처가집에 살면서 의열단 본부로도 남았다. 그때쯤부터 김원봉의 비서(秘書) 역할도 맡아 하였다. 1925년 8월경 김원봉을 비롯한 다수의 의열단원들이 광저우(廣州)로 내려갈 때 동행하였다. 1926년 4월 국민혁명군 중앙군사정치학교(中央軍事政治學校, 통칭 황푸아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의 제5기 입오생(入伍生)으로 들어갔다가 9월 16일 정식 생도가 되었다. 동년 10월 북벌군이 우창(武昌)을 점령하고 1927년 원단(元旦)에 중앙군사정치학교 우한분교(武漢分校)를 개교하자 옮겨가 정치과에서 수학하였다. 또한 의열단 우창지부원이면서 유악한국혁명청년회(留鄂韓國革命靑年會, ‘鄂’은 우한이 속한 후베이성[湖北省]의 별칭)의 회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가 감행한 4·12 정변의 여파로 국공합작의 우한 정부가 분열되어 무너지고 8월 1일 중국공산당의 난창봉기(南昌蜂起)와 12월의 광저우봉기로 국공대결 형세가 확연해졌다. 1928년 2월 후난성(湖南省)의 중국인 친구를 찾아가던 중 우한에 들러 류자명을 만났고, 2월 27일에 같이 한커우(漢口)로 건너가서 안동만(安東晩)·최원(崔圓)·최승년(崔承年)을 만났다. 3·1운동을 기념하고자 하룻밤을 묵은 28일 아침에 일본영사관 특무의 간계로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아 우한공안국에 붙잡혔다. 단원 박건웅(朴建雄)이 임시정부의 석방탄원서를 받아와서 교섭한 결과로 6개월 만인 8월 말에 석방되었다. 그 후 몇 년간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으나 중국군 장교로 복무한 것으로 보인다. 1934년 6월에 난징(南京) 모 중국군 부대의 연장(連長, 중대장)이면서 모 군관학교의 교관이기도 한 것으로 일제 관헌에 신상이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1929년 말경에 의열단이 베이징(北京)으로 본부를 옮겨갔다가 1932년 초 난징으로 본거를 다시 옮긴 후 중국 측에 한·중 합작의 항일운동을 제안한 결과로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비밀리에 설립하였다. 1932년 10월에 그 학교의 제1기 교육과정이 개설되었을 때부터 정치위원이었고, 1933년 4월까지의 제2기 교육과정에서는 정보학 교관이 되어 가르쳤다. 1934년 3월 1일부터 3일간 난징 문창항(文昌巷)의 음식점 육화춘(六華春)에서 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미주국민회 총회·하와이 국민회 등 6개 단체 대표 또는 대리인 12인이 모여서 열린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제2차 대표대회에 윤세주(尹世胄)·박건웅과 함께 의열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대동단결체(大同團結體) 조성방침안’을 토의 결정함으로써 이듬해 단일대당으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립되는 큰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무렵 “절대독립의 민족주의자로서 과격사상을 갖고 있다”라는 인물평을 일제 당국으로부터 받고 있었다. 1937년 1월 난징에서 개최된 민족혁명당 제2차 전당대표대회 때 15인 중앙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고, 1938년 5월 19일부터 3일간 후베이성 장링(江陵)에서 개최된 조선민족혁명당 제3차 임시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41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김붕준(金朋濬) 의장의 협조로 조선민족혁명당의 의정원 진출이 시도되었을 때 경상도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의 거센 반발과 ‘비법선거 무효 선포’로 인해 등원은 저지되었다. 1943년 2월 충칭(重慶)에서 열린 조선민족혁명당 제6차 전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재선되었고, 김원봉의 비서주임도 겸직하였다. 그 해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이 주석(主席) 김규식(金奎植)의 명의로 당원 16명을 인도공작원으로 파견하려 했을 때 그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파견이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1945년 3월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 강화를 위해 증파키로 한 대원 5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출발 전에 버마탈환작전이 종료됨으로써 증파가 취소되었다. 8·15 광복 후 환국하지 않고 중국에 남아있었다. 1947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의 후신으로 인민공화당(人民共和黨)이 서울에서 창립될 때 상해총지부 책임자로 임명되었는데 그 해 난징에서 병환으로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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