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준
金道俊1869. 10. 3 ~ 1920. 9. 2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족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경신참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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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69년 10월 3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양서면(楊西面) 신성리(新城里)에서 출생하였다. 일찍부터 기독교에 입문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압록강을 넘어 서간도 싱징현(興京縣, 현 新賓縣)으로 망명하였다. 싱징현은 인접한 환런현(桓仁縣)만 지나면 한·중 국경인 압록강에 도달할 수 있어 이른 시기부터 많은 한인이 이주해 살았으며, 기독교인이 많아 여러 개의 한인교회와 그 부속학교도 상당수 설립되었다. 싱징현 이주 초기부터 교회 일에 관여하며 한인들의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일에 앞장섰다. 또한 싱징현 왕칭먼(旺淸門)교회가 설립되고 장로 직분을 받은 후부터 더욱 교회와 민족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 1월에는 서간도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한족회(韓族會)가 설립되자 싱징 지방을 관할하는 의사부장(議事部長)에 선임되었다. 1919년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이 서간도에 전해지자, 3월 21일 싱징현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왕칭먼교회 앞에 모인 약 400명의 한인은 먼저 조직적인 시위 운동 전개를 위해 지휘부인 의용단(義勇團)을 결성하고 대형 태극기를 세워 독립축하회를 거행한 뒤 만세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때 왕칭먼교회의 장로이자 한족회 의사부장, 싱징현 한인 사회의 원로로서 지휘부에 가담해 시위대의 안전과 질서 유지를 이끌었다. 행진이 진행될수록 한인들이 계속 참여해 시위대의 규모는 약 500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중국 관군의 제지로 충돌하여 9명의 한인이 총격으로 사망한 뒤 해산하였다. 서간도 이주 한인들이 이 같은 3·1독립운동을 실천해 충만한 민족정신을 보이자 한족회는 지금까지 준비해온 독립전쟁을 위한 무장력과 한인 사회를 바탕으로 본격적 독립운동을 전개할 준비를 갖추었다. 한족회에 이전까지 한인 사회 자치를 이끌어 왔던 부민단(扶民團)과 자신계(自新契)·교육회(敎育會) 등을 통합 확대시켜 본격적 독립운동기구로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이 단체는 191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신민회(新民會) 회원들이 주도해 중점적으로 독립운동기지로 개척한 류허현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본부는 이탁(李沰)이 정무총장에 선임되어 이끌었고, 그 밑에 김동삼(金東三)·양규열(梁圭烈)·이진산(李震山)·최명수(崔明洙)·윤기섭(尹琦燮) 등이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다. 한족회는 이 같은 조직과는 별도로 오직 조국 광복만을 전담할 군정부(軍政府)를 설치하였다. 또한 서간도 각지에 흩어져 형성된 한인 사회에는 그 규모에 따라 총관(總管), 가장(家長), 실장(室長) 등의 지방기구를 설치하였다. 지방기구 중의 하나인 의사부장은 이주 한인들의 민의(民意)를 수렴해 총관과 협의해 해결하거나 지역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본부에 상달해 해결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 민족적인 3·1운동의 실천으로 조국 광복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국가적 차원에서 침략자 일제와 결전을 치루기 위한 정부 수립이었던 것이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한족회는 한 국가가 두 개의 정부를 둘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군정부를 독립군단(獨立軍團)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하였다.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독판(督辦)이 되어 이끈 서로군정서는 임정 산하의 독립군단임을 자임하며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서로군정서 탄생을 전후 시기, 서북간도 지역에는 이 군단과 같은 목표를 가진 많은 독립군단이 성립되었다. 3·1운동의 전개로 때가 왔음을 느낀 독립운동가들이 준비해 온 무장력을 바탕으로 항일투쟁을 실천할 독립군단들을 성립시킨 것이다. 이들 독립군단들은 성립과 동시에 독립군 유격대를 결성해 압록·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해 일제 침략자들을 처단하고 침략기관을 파괴하였다. 독립군들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당한 일제는 독립군들을 대대적 공격하기 위해 1920년 10월 2일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고 이를 구실로 약 2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 제19, 20사단을 비롯해 시베리아파견군, 북만주파견군, 관동군 등이 연합해 서북간도 독립군기지와 한인 사회를 동서남북 사방에서 포위하며 공격해 들어왔다. 우수한 장비로 무장하고 서북간도를 침략한 일본군들은 독립군은 물론 일반 한인까지 배일(排日)의 기미를 조금이라도 보이면 즉시 살해하였다. 또 반일정신의 온상이라 하여 한인학교·교회 등은 발견 즉시 방화해 소각했고, 독립군의 가옥 또한 확인 되는대로 불태워 없앴다. 이듬해인 1921년 4월 철수 시까지 3,700명에 가까운 한인을 살해했고, 3,300채가 넘는 한인 학교·교회·가옥 등을 불태워 없앴다. 이처럼 3·1운동 직후 서간도에는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단들이 속속 조직되어 유격대를 조직하고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여 일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에 일제는 1920년 10월부터 약 2만 명의 일본군을 서북간도(西北間島)로 투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4월까지 6개월 동안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間島慘變)이란 대만행을 저질렀다. 1920년 9월 24일 사망하였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1920년 10월 31일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싱징현에 도착한 일본군은 싱징 3·1운동의 진앙지인 왕칭먼교회를 기습 공격하여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끌어냈다. 그리고 교인 명부를 확보한 뒤 끌려온 사람들을 추궁해 가택까지 쳐들어가 주요 인사들을 체포·포박하였다. 이때 교회 장로이자 한족회 의사부장으로 싱징현 한인 사회를 이끈 주요인물이었으므로 교회 회장이자 한족회 간부인 황원후(黃元厚)와 함께 붙잡혔다. 이들 외에도 7명이 더 포박당해 산속으로 끌려가 칼에 찔려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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