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빈
金道彬1893. 7. 29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광복단
포상 정보
- · 애국장(201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1) 1893년 7월 29일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공포면(公浦面) 방화리(芳花里)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만주로 건너간 시기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1921년 (음)4월 창바이현(長白縣) 왕개동(王開洞)에서 독립군단인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였다. 광복단은 1919년 북간도(北間島) 왕칭현(汪淸縣)에서 성립되었다. 단장은 이범윤(李範允)이었으나 원로로서 추대된 것이었고, 실질적으로 성립을 주도하고 군단을 이끌어 간 인물은 김성륜(金聖倫)·김성극(金星極) 등 젊은 층이었다. 이들은 왕칭현에 본단(本團)을 설립한 후 안투현(安圖縣) 내도산(內島山)과 창바이현 8도구(道溝), 12도구, 17도구, 20도구 등에 분단(分團)을 설치하였다. 특히 창바이현에 여러 개의 분단을 설치한 이유는 이 지역이 한국의 혜산(惠山)과 접한 국경지방으로 국내 진입전을 전개하기가 다른 지역보다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왕개동에서 입단하였으므로 분단의 대원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입단한 지 얼마 후 문서검사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입단한 그해 (음)6월 중순, 이인환(李仁煥)·강창룡(姜昌龍)·차병학(車秉學) 등의 대원들을 이끌고 독립군 요원 및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진입하였다. 4명의 대원들은 먼저 함경남도 단천군(端川郡) 하수면(下水面) 황곡리(黃谷里)에 있는 강주천(姜周天)의 집을 거점으로 한 후 활동을 시작하였다. 강주천은 정식으로 광복단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독립군이 될 기회만을 보고 있던 인물이었다. 하수면에서 군자금을 납부할 만한 부호들을 조사해 주소와 명단을 작성하고, 청년들을 만나 광복단 단원이 되도록 권유하였다. 이곳에서 이종숙(李鍾淑)·이종의(李鍾義)를 비롯한 여러 명의 인사들을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약 2개월간 활동한 후 거점을 같은 군 이중면(利中面) 하전리(荷田里)로 옮겼다. 이중면에도 그들을 적극 지원해 줄 최덕복(崔德福)과 안인현(安仁賢)이란 인물들이 있었다. 대원들은 이들 두 조력자의 집을 오가며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군자금과 대원 모집에 나섰다. 최덕복과 안인현이 적극적으로 지원한 까닭에 상당한 수의 청년이 광복단 대원으로 가입하였고, 군자금 모집 또한 성과가 컸다. 따라서 하수면과 이중면에서 가입한 대원들을 바탕으로 광복단 국내 지단(支團)과 분단을 설치하였다. 이들과 함께 폭을 넓혀가며 활동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다. 이에 하수면으로 이동해 백운촌(白雲村) 산속에 위치한 천도교 교당(敎堂)으로 은신하였다. 하지만 이곳도 단천경찰서 소속 경찰대에 파악되고 말았다. 1921년 11월 24일 새벽 대규모로 구성된 경찰대가 기습·공격해왔다. 국내 지단원들까지 합해 10명 가까운 대원들이 사력을 다해 대항하였으나 병력과 전투력에서 역부족에서 단원 6명과 함께 붙잡혔다. 나머지 대원들은 교전 중 산속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계속된 검거 작전으로 하수면과 이중면에서 피신한 대원을 비롯한 관련자 140명이 붙잡혔다. 이중 관련이 없다고 판명된 사람들은 석방되고 최후로 37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과 함께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재판을 받아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투옥 후 감형되어 7년 6개월 여의 옥고를 겪고 1929년 5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 고향으로 향하던 중 단천에 들려 최덕복을 비롯한 옛 동지들을 만났다. 이를 알게 된 일제는 다시 광복단 지단 부활을 계획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모두 붙잡았다. 출옥한 지 2주 만에 다시 붙잡혀 징역 4년 형을 받고 또 다시 옥살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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