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내홍
金迺洪1895. 4. 29 ~ 1951. 4. 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보합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5년 4월 29일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서림면(西林面) 광봉동(光峯洞)에서 태어났다. 보합단(普合團)에서 같이 활동한 김내범(金迺範)의 형이며, 김내찬(金迺贊)·김승옥(金昇玉)도 같은 집안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920년 음력 4-5월경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보합단원 김동식(金東植)·백운기(白雲起)·안효준(安孝俊) 등이 군자금을 요청하자 어음 200원을 현금으로 교환해 주었다. 이후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할 군자금을 모집하고 밀정과 친일 주구배를 처단한다는 보합단의 활동 목적과 취지에 동의하여 동생 김내범과 함께 가입하였다. 평소 친분이 있던 이일화(李壹華)와 소작인 이윤성(李允成), 숙부인 김승옥(金昇玉)을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음)8월 20일경 의주군(義州郡) 동암산(東巖山)에 있던 보합단 본부를 선천군으로 이동할 당시 단원 20여 명에게 가족과 마을 사람 등과 함께 식사를 제공하였다. 보합단의 재정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보합단 총무장으로 임명된 동생 김내범과 함께 군자금으로 모집한 현금과 어음을 비롯해 각종 문서와 무기류 등을 관리하였다. 더불어 용천군(龍川郡) 외상면(外上面) 동석리(東石里)에 사는 장인 이용섭(李用涉)으로부터 현금 60원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보합단이 모은 군자금은 어음을 포함해 약 2만 6,000여 원으로 현금 모금액만도 1만 2,000원에 달했다. 군자금 대부분은 임시정부의 활동 지원금으로 전달되거나 보합단의 무기 구입비로 사용되었다. 또한 효과적인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단원들과 직접 시위용 폭탄을 제조하기도 하였다. (음)9월경 용천군(龍川郡) 박초식의 집에서 단원들과 폭탄 11개를 제조해 국내 단원들의 집에 분산 은닉한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보합단이 내산의 본거지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철산경찰서에 활동과 본거지가 노출되고 말았다. 철산경찰서 경찰대와 선천군 산면(山面) 보곡사(普谷寺) 부근에서 교전을 벌이다 백운기·박세정(朴世正)은 일제경찰에 붙잡혔다. 한우종(韓禹種)·이동원(李東元)·김응초(金應焦)는 교전으로 순국했으며, 단장 김중량은 부상을 입고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보합단은 총무 김동식과 단장의 아들인 김덕하(金德河)·김태하(金泰河), 그리고 김하원(金河元)·안교준(安敎俊) 등을 중심으로 국내에 은신하면서 군자금과 단원을 모집하다가 11월경 중국 콴뎬현(寬甸縣) 모전자(毛甸子)로 본부를 옮겨갔다. 보합단 단원 일부와 함께 국내에 남아 군자금 모집 활동을 지속하였다. 본부가 중국으로 이전해 감에 따라 김동식에게 어음과 보합단 취의서·입단청원서·경고문·사형선고문·영수증 등 각종 서류를 받아 보관하였다. 맡았던 현금은 대부분 본부 이전을 위한 여비로 충당되었다. 같은 해 12월 초 서울 무장계획단과의 연합투쟁 거사 자금에 사용하도록 100원을 조원세(趙元世)를 통해 이광세(李光世)에게 전달하였다. 서울 ‘운니동사건(일명 관철동사건)’으로 김도원이 체포되면서 서울의 은행을 습격해 대량의 군자금을 마련하려던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경기도 제3부와 종로경찰서, 평북 제3부 합동의 대대적인 수색작전 끝에 집안에 숨겨 두었던 장부와 무기 등을 압수당하였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보합단 단원 2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1922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폭발물취체벌칙 위반·강도 등의 죄목으로, 징역 2년과 벌금 50원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걸순⋮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