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룡
金吉龍1912. 8. 21 ~ 1937. 4.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전남운동협의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12년 8월 21일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군외면(郡外面) 대야리(大也里)에서 태어났다. 1928년 3월 완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9년 4월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형편으로 인해 1930년 11월경 중퇴하고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중앙고보 재학 시절부터 다수의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공부하였고, 1932년 5월 비밀결사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주로 완도와 해남(海南)을 중심으로 하여 인근의 장흥(長興)·강진(康津)·영암(靈巖) 등지와 연계해 활동한 조직이었다. 전남지역의 농민·어민·노동자·지식인을 포함한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목적으로 하였다. 산하에 사무부(事務部)·조직부(組織部)·조사부(調査部)·구원부(救援部)의 조직을 갖추고 기관지 『농민투쟁』을 발간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였다. 또한 ‘영농회사(營農會社)의 토지겸병 반대, 양반 기타 봉건사상과 지방열(地方熱) 배격, 소작료 감하 및 전정(全定) 요구, 면화와 김 등의 가격 인상 요구, 호세(戶稅) 인하 요구, 간상(奸商) 배격’ 등 실제 농민의 경제생활과 밀접한 슬로건들을 내걸고 활동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에 가입한 뒤 1932년 11월 초순경 완도군 군외면 대야리 다리 위쪽의 묘지에서 황동윤(黃同允)·최창규(崔昌珪) 등과 회합하여 완도 농민운동의 지도기관 조직 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먼저 각자 부락에서 소작인이나 어업조합원 등과 함께 소작쟁의나 어업조합 폐지 운동을 일으키고, 완도읍 내의 노동조합에 세포조직을 만들며, 야학회 설치 등을 통해 동지를 규합하기로 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반(班) 조직을 결성하고 여러 반을 종합하여 차츰 상부조직인 지도기관을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같은 달 20일 군외면 황진리(黃津里) 이두성(李斗聲)의 집에서 황동윤·조동선(趙東善) 등과 회합하였고, 군외면 어업조합 반대운동을 먼저 일으키기로 하였다. 1932년 11월 군외면 대야리 마을 내 3등(等) 도로의 교량 수축공사에 종사하는 인부 30여 명에게 현재 임금의 부당함을 설명하고 임금인상 투쟁을 주도하였다. 1933년 2월 대야리 마을사무소에서 주민 50~60여 명에게 마을 사립학교의 운영 기본금을 빈부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균일하게 부과하는 것은 부당하므로 이러한 불공평한 징수 방법을 즉시 철폐하고 자산의 정도에 따라 차등 징수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주민들의 반일의식을 고취하고 지역 주민을 규합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34년 2월 전남운동협의회의 주요 간부가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6개월 동안 전남 경찰부 고등과의 지휘로 완도를 비롯해 강진·해남·장흥·영암·목포(木浦)·보성(寶城)·진도(珍島)·순천(順川)·여수(麗水) 등 9개 군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과 관련된 558명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 관련자만 3,000명에 달한다고 발표할 정도로 대규모 사건이었다. 이른바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오랫동안 취조와 고문을 받고,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545일 본형 산입) 형을 선고받았다.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37년 1월 7일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같은 해 4월 20일, 20대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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