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문
姜永文1888. 2. 19 ~ 1965. 4. 1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인국민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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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1888년 2월 19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에서 아버지 강명화(姜明化)와 어머니 송씨 사이의 6남 1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증산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강서군 소재 사립 창신중학교(彰新中學校)를 졸업하였다. 1905년 6월 9일 아버지가 첫째아들 강영대(姜永大), 둘째아들 강영소(姜永韶) 부부와 막내아들 강영각(姜永珏)을 데리고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어머니를 비롯한 나머지 형제들인 강영상(姜永商)·강영렬(姜永烈)과 함께 국내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아버지와 형제들이 있는 미국으로 향하여 1913년 12월 몽골리아 선편으로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흥사단 이력서에 국내에 딸이 있다고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국내에서 결혼하였으나, 혼자 도미하였던 것 같다. 국내에서의 활동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지만, 『국민보』 1914년 3월 25일 자 기사에 “우리 동포의 한결같이 사랑하는 형제인 강영문 씨는 내지에 있을 때에 종교계와 교육계를 위하여 많은 힘을 허비한 고로 그 경력과 재능이 가히 모범할 만한 청년이라”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국내에서도 종교계와 교육계에서 상당한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하와이에 잠시 머물다가 부형을 따라 1914년 3월 미국 본토로 갔다. 미국에 도착 후 아버지와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대한인국민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5년 8월 29일 디누바 지방회 주최의 국치기념일 행사 때 연설한 것으로 보아 디뉴바(Dinuba) 지방에 거주하였던 것 같다. 그 후 오하이오주의 애크론(Akron)으로 이거하여, 1919년 1월 조직된 애크론지방회의 서기로 선임되었다. 실업부원에는 강영상이 선임되었다. 애크론 지방에는 둘째형 강영소가 그의 두 동생을 데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강영상과 함께 중등학교에 다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후원하려고 1918년 11월 24일부터 1919년 12월 15일까지 대표의연·독립의연·21례·애국금·공채표 등 5종류의 독립운동 자금 59.09달러를 제공하였다. 1920년 7월 26일 윌로스(Willows)에서 비행가양성소를 조직할 때 서기로 임명되었으며, 1922년 1월에는 북미지방총회의 사무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학업을 위해 남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태프트(Taft)로 이주하여 태프트전문대학(Taft Junior College)에 다녔다. 1923년 2월 태프트지방회가 설립되어 서기 겸 재무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24년 10월 12일 태프트의 오일 회사에 근무하는 한인들이 거처하는 처소에 불이나서 자택 외 여섯 집이 모두 불타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태프트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둘째형 강영소가 시카고(Chicago)에서 식당을 개업하면서 동생 강영상과 함께 식당 경영에 참여하였다. 강씨 형제들은 시카고에서 로렌스 카페테리아(Lawrence Cafeteria)라는 조그만 식당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크게 성공을 하였다. 『우라키』 제2호에 실린 「재미동포 실업 상황」이라는 표에 의하면, 1926년 당시 로렌스 카페테리아의 자본금은 3,000달러이고, 고용원은 6명, 연 매출액은 3만 달러였다고 한다. 1926년 디버시 파크웨이(Diversey Parkway)에 카페테리아를 사서 디버시 카페테리아(Diversey Cafeteria)라는 식당을 개업하여 사업을 확대하였다. 처음 둘째형 강영소와 동생 강영상의 카페테리아 경영에 도움을 주다가, 1927년경 본격적으로 식당 운영에 나섰다. 강씨 형제들은 로렌스 카페테리아와 디버시 카페테리아를 경영하여 1927년 당시 두 식당의 좌석이 180여 개쯤 되었고, 매일 600명 정도의 손님을 받았다. 이리하여 강씨 형제들의 연 수입은 9만 달러 정도가 되었다. 1930년 말 강씨 형제들은 ‘강씨 형제 카페테리아회사(KANG BROTHERS CAFETERIA CO.)’라고 하여 두 곳에서 영업을 하였다. 로렌스 카페테리아는 1만 6,000달러의 자본금으로 이루어진 합자회사로 총수입이 5만 달러에 이르렀고 고용인이 14명이었다. 디버시 카페테리아의 자본금은 2만 달러, 총수입은 6만 달러였다. 고용인은 16인, 지배인은 강영소였으며, 강영대·강영소·강영상·강혜순과 함께 주주였다. 강씨 형제 카페테리아회사는 1931년 중반 시카고의 윌슨가에 윌슨 카페테리아(Wilson Cafeteria)를 새로 개업하여 모두 3개의 식당을 경영하였다. 강씨 형제들은 모두 카페테리아 사업에 참여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회의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1927년 11월 시카고지방회 실업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8년 12월에는 재무 겸 실업부원, 1929년 12월에는 실업 겸 구제원이 되었다. 또한, 1930년 11월에는 시카고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시카고 지역 한인 실업가들로 구성된 시카고상우회를 창립하였다. 그런데 시카고에서 카페테리아를 운영하던 둘째형 강영소가 1931년 8월 5일 오후 1시에 갑자기 실신하였다. 고혈압으로 뇌혈관이 터져 오른쪽 반신불수가 되었다. 강영소는 그해 8월 말 병원에서 퇴원하여 시카고 서쪽에 있는 휘튼의 요양소에 머무는 동안 회복의 속도가 빨라 6개월이 지난 1932년 3월 시카고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형의 간호를 주로 담당하였다. 시카고에서 카페테리아 사업을 하던 강씨 형제들은 불경기가 계속되던 시기에 파산 위기를 맞았다. 김경(金慶)이 동업 형태로 상당한 자본을 투자하여 건물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1933년 2월경에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로렌스 카페테리아는 2년 후에 경영이 부진하게 되었고, 디버시 카페테리아만을 경영하며, 법정 관리로 들어갔다가 1936년 1월 전후 박필(朴必)이 매입하여 운영하였다. 시카고에서 카페테리아 사업이 실패한 이후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를 오가며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 12월 시카고 지방회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38년 1월에는 흥사단에도 가입하였다. 그리고 1938년 7월 그동안 경영해 오던 카페테리아를 팔았다가 그해 8월에 다시 매수하여 사업을 계속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중국의 난민과 재중 한인들을 구제하려는 목적으로 뉴욕·시카고·로스앤젤레스에서 중국후원회(The China Aid Society)가 조직되었다. 중국후원회의 활동은 미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시카고에서 강영승·장세운·천세헌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40년 12월에는 시카고지방회 대표원, 1941년 12월에는 재무, 1944년 12월에는 시카고지방회 대표원으로 선임되는 등 국민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중국의 조선민족혁명당을 지지하는 미주총지부와 같은 진보적인 단체와 관계하고 있었다. 『신한민보』 기사에 의하면 1914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금 555.91달러를 지원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한인 동포를 위한 각종 사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는데, 1946년 5월 1일 재미 상공업에 종사하는 한인들은 재미한인상업회의소(在美韓人商業會議所)를 조직하였고, 부회장으로서 캘리포니아주의 관허를 얻었다. 1962년 3월 미주 한인을 위한 한인센터를 설립하기 위해 조직된 캘리포니아 한인센터설립위원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여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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