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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흘

高道屹

1872. 10. 25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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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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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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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북청(北靑)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북청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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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2)

관련 사건

  • · 이인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2) 1872년 10월 25일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덕산면(德山面) 만항리(晩項里)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당시 함남 풍산군(豊山郡) 안산면(安山面) 노은리(老隱里)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고 천도교인이었다. 1919년 3월 10일 맹시정(孟時楨) 등 천도교인들과 함께 김병식(金炳軾)의 집에서 강희준(姜熙俊)으로부터 서울에서 손병희가 주동하여 3·1운동이 일어났고 전국에서 만세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3월 13일에는 맹시정 등과 함께 안산면 하지경리(下地境里)에 있는 풍산천도교구에서 이계술(李啓述)에게서 풍산 시위에 관한 구체적 계획을 듣고 참여하기로 하였다. 3월 14일 노은리 천도교인들과 함께 천도교구에 도착하였다. 천도교구 앞뜰에서 맹시정은 태극기를 흔들었고 김창선(金昌善)·박인진(朴寅鎭) 등의 연설이 끝난 후 200여 명의 천도교인이 독립 만세를 불렀다. 풍산헌병분견소 헌병들이 긴급 출동해 해산을 시도하였으나 시위대는 저지를 뚫고 헌병분견소 앞으로 행진하였다. 오후 2시경 헌병분견소에 도착하였을 때 시위대는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헌병들이 무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시위대는 헌병분견소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였다. 이를 저지하려는 헌병의 발포로 시위대 2명이 현장에서 절명하였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1심 재판을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1919년 8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본인의 행위는 한국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기초한 의사 발동으로 범죄가 아니다. 그런데 유죄 판결은 부당하여 복종할 수 없는 위법한 것”이라며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10월 23일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2월 23일 만기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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