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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원국

郭元國

미상 ~ 1921.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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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곽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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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吉林省)만주방면

지도 위치

광역 지역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중국 지린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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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1) 출생 시기는 알 수 없으며,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바이현(長白縣)에서 출생하였다. 1921년 6월까지 독립단원이 되어 북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병(官兵)과 교전 중 전사하였다.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단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군은 대한독립단을 주로 독립단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대한독립단이 창바이현 일대에 지단(支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지단장(支團長)인 유일우(劉一優)와 단원 김병연(金秉淵)·박기연(朴基淵) 등은 창바이현 일대에서 많은 군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1921년 6월 대한독립단은 대체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기구인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로 통합되었지만, 그 세력이 일부나마 남아 있었다. 1920년 말 대대적으로 전개된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연해주(沿海州,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로 많은 무장독립 단체가 이동하는 와중에도 산발적으로 일본 군경에 저항하는 세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동료 독립단 단원 41명과 함께 여전히 오지(奧地)와 민간인 거주 지역을 오가면서 소규모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일본군 제19사단은 1921년 6월 간도 일대에 대한 독립운동 정황을 지속해서 감시하고 있었다. 일본군 제19사단 참모장(參謀長)으로 간도에 파견된 하라다(原田) 대좌(大佐)의 기록에 의하면, 1921년 6월 간도 일대는 경신참변(庚申慘變) 이후에도 독립운동 세력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 여러 곳에서 독립운동 정황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중 6월 17일 벌어진 독립단 42명과 중국 관병(官兵)의 전투 사실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순국 당시 정황을 파악해 볼 수 있다. 위 기록에 의하면, 1921년 6월 17일 중국의 안둥현(安東縣) 관지방(官地房)에서 42명으로 구성된 독립단은 중국의 관병과 교전하게 되었고 전투 중에 독립단원 6명이 죽고 1명이 다쳤다. 그 결과 독립단은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총기류 6정과 탄환을 약간 버려둔 채 깊은 산속으로 피해 들어갔다. 이로써 독립단이 얼마나 급박하게 교전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교전 당시 최성운(崔成雲)·지영걸(池永傑)·김봉환(金鳳煥)·이성준(李成俊) 등과 함께 순국하였다. 한편, 중국 관병 측에서는 조선인 통역 1명이 죽고 병사 1명이 다치는 데 그쳤다. 중국 관병이 조선인 통역을 데리고 간 점과 하라다 대좌가 이 사실을 정확히 기록한 사실 등을 통해 볼 때, 일본군이 중국 관병을 사주해 독립군을 습격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때문에 갑작스럽게 습격당한 독립단은 동료의 유해도 수습하지 못한 채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후 중국 관병은 교전이 일어난 지역의 주민에게 명하여 독립단원의 시신 6구를 백두산 일대 소마록구(小馬鹿構) 부근에 매장하도록 하고 철수하였다. 교전이 끝난 지 2~3일 후에 돌아온 독립단원들은 이 무덤에 묘표(墓標)를 세워 6명의 넋을 기렸다. 이때 “대한충의사(大韓忠義士) 곽원국의 묘”라는 묘표가 세워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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