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공우
金公瑀1902. 2. 28 ~ 1966. 1. 2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8)
관련 사건
- · 서울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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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8) 1902년 2월 28일 평안남도 평양(平壤)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는 서울 중림동(中林洞)에 거주하며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일제 말기의 창씨명으로 금산공우(金山公瑀)가 확인된다. 1919년 3월 17일 조선약학교 재학 중 잘 알고 지내던 휘문고보 학생 정지현(鄭志鉉)으로부터 학생 중심의 만세 시위는 힘이 약하니 노동자계급이 만세 시위에 나서도록 제작한 『노동회보(勞動會報)』를 배부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정지현의 권유를 수용하고 배희두(裵熙斗)에게 동참을 권하였다. 1919년 3월 20일 배희두와 함께 노동자는 한국 독립운동에 종사하기 바란다는 내용이 게재된 『노동회보』 11매를 화천정(和泉町, 현 서울 중구 순화동 일대) 부근 노상에서 시민에게 배포하였다. 또한 3월 21일과 22일 이틀간 서울 중림동과 순화동 부근의 노동자를 규합하며 노동자 대회 개최를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22일 봉래정(蓬萊町, 현 서울 중구 만리동 일대)에서 열린 노동자 대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노동자들과 함께 의주로(義州路, 현재 서울 중구 의주로)로 진출하여 아현 고개까지 시위 행진하였다. 수백 명의 군중이 ‘조선 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경찰과 군인이 출동해 시위대를 강제해산시켰다. 이 만세 시위로 경찰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1919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1919년 6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다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1년 3월 3일 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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