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원석
權元石미상 ~ 1908. 12. 1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김상태 의진(김상태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03)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3)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다. 강원도 양구군(楊口郡) 수입면(水入面) 수귀동(守貴洞)에서 거주하였다. 김상태(金尙台)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김상태는 김상태(金相台) 혹은 김경륙(金景六)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한 의병장이다. 충북 영춘(永春) 남천(南川) 출신으로 전국도창의대장(全國都倡義大將) 이강년(李康秊)이 1896년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의형제를 맺고, 그 아래에서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다.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柳麟錫)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영월(寧越)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이후 만주로 이동하여 활동하다 귀국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정운경(鄭雲慶)과 제천(堤川)·단양(丹陽)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이강년 의병부대와 다시 합세하여 순흥(順興)·봉화(奉化)·풍기(豊基)·영춘·영월 등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이강년이 체포되자 군사지휘권을 인계받았고, 소백산맥을 근거로 삼아 유격전을 벌여 일본군과 교전한 것이 50여 차례에 달하였다. 이러한 활약으로 인해 일제의 감시가 더 심해져서 가족까지 심문 및 가택 수색을 당하였다. 일제는 김상태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면서 김상태와 의형제 관계를 맺고 있어 주목하고 있었다. 일제의 조사에 따르면, 김상태와 지극히 친밀하여 행동을 한가지로 하는 인물이었다. 일제는 1908년 11월 8일에 김상태가 수귀동에 잠복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중위 오타(太田)가 이끄는 금성수비대(金城守備隊)를 보냈으나 미리 인지한 김상태가 도피하여 체포하지 못하고 귀대하였다. 김상태가 잠복한 곳은 수귀동에서 약 1,000미터 떨어진 산 속 예배당이었다. 예배당이라 함은 이름뿐이고 최근익(崔根益)과 함께 산 중의 세 가옥을 주거 겸 교회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일제의 보고에 따르면, 이 예배당에는 원산(元山)과 금성을 왕복하며 선교하던 통칭 하리영(河鯉永)이라고 불리는 영국인이 들러 포교하였다고 한다. 그와 최근익도 도주한 상황에서 김상태를 체포하지 못한 수비대는 세 집을 수색하였고, 교회당의 이웃집 장롱 속에서 김상태의 의류 및 서류를 발견하면서 김상태가 이곳에 잠복하였던 사실만을 확인하였을 뿐이었다. 이처럼 김상태의 피신에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해 12월 19일 금성수비대는 다시 한번 수귀동을 습격하려고 출발하였다. 이날은 그와 최근익이 머무르고 있었던 것을 탐지하고 출동한 것이었다. 이들이 잠복하고 있던 집의 전후 입구로 들어가 즉시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최근익의 힘이 강대하고 곤봉으로 격렬하게 저항하자 총격을 가해 살해하였다. 초기 일제의 보고서에는 최근익이 기독교인을 가장(假裝)한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1년 후의 보고에는 모두 기독교인인 것은 사실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김상태는 이후에도 의병 활동을 지속하였고, 1909년 단양의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현상금을 받으려던 우중수(禹中守)의 밀고로 결국 순흥에서 잡혀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3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식음을 전폐하고 단식 13일 만인 1912년 7월 28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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