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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남

高濟南

1887. 3 ~ 1909.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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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고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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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高敞)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고창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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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최익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중기의병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7년 3월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성내면(星內面) 옥제리(玉堤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복경(復京), 호는 인산(仁山)이다. 고석진(高石鎭)의 문인이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최익현(崔益鉉)은 1905년 12월 말 충청남도 논산 궐리사(闕里祠)에서 강회를 열고 거의를 맹세하였다. 각지의 유림에게 창의를 독려하는 한편, 거의를 위해 1906년 2월 충남 정산(定山)을 떠나 호남으로 향하였다. 최익현은 삼남의 지사들과 연합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각지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하려 하였다. 이때 고창 출신의 유생 고석진(高石鎭)과 진안(鎭安) 출신 최제학(崔濟學), 전 낙안군수 임병찬(林炳瓚) 등이 최익현을 호남으로 모셔와 의병장에 추대하려 하였다. 1906년 5월 최익현이 태인(泰仁) 종성리에 도착하자, 고석진·노병희(魯炳喜) 등이 맞이하였다. 최익현은 의병 모집부터 군수물자 조달, 군사훈련 등의 군무를 임병찬에게 위임하고 전라도 각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였다. 거사 날짜가 임박하자 최익현과 임병찬은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 모집과 군기 수집에 전력을 기울였다. 최익현은 호남 지역 유림의 거두이며 항일 세력의 중심인물이던 기우만(奇宇萬)과 5월 30일 담양(潭陽) 추월산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50여 명의 호남 각지 명유와 함께 거의를 천명하고 「격문」을 발포하였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이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하고 의병을 일으키자, 족숙(族叔)이자 스승인 고석진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최익현 의병부대는 태인 향교에 행진하여 일본의 야만성과 침략성을 규탄한 「기일본정부서(寄日本政府書)」를 통감부에 보냈다. 6월 5일 정읍을 점령하고 군총·화승·탄환 등 무기를 확보하며 의병을 소모하여 군세를 강화하였다. 6월 6일 내장사 뜰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순창(淳昌) 구암사(龜巖寺)로 갔다. 7일 순창읍으로 들어가 화력을 보강하고 포군들을 비롯한 군사를 모았다. 순창에서 의병부대의 편제를 정비하고 여러 역할을 나누었다. 8일 남원(南原)으로 진출하기 위해 곡성(谷城)으로 갔다. 남원의 방비가 견고하다는 첩보에 다시 순창으로 향하였다. 도중 일본군과 교전하여 물리쳤다. 10일 순창으로 귀환해 유진(留陣)할 무렵에는 군사가 900여 명에 달하였다. 일본은 광주(光州)와 전주(全州)·안동(安東)의 진위대까지 동원하여 태인의병을 탄압하였다. 6월 11일 관찰사도 의병 해산을 명하는 조칙과 고시문을 보내 해산을 종용하였다. 최익현이 거절하자, 전주진위대와 남원진위대는 의병진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최익현은 처음 이들을 일본 군경으로 추측하고 전투 태세에 돌입하였으나, 얼마 뒤 동족인 진위대라는 사실을 알았다. 최익현은 진위대에 통첩하여 같이 왜적을 토멸하자고 권유하였다. 진위대가 이 제의를 무시하고 의병 해산을 계속 압박하자, 최익현은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 하여 의병을 해산하였다. 다음 날 최익현과 지휘부 12명이 체포되면서 태인의병은 짧은 활동 끝에 해산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그리고 군대해산으로 말미암아 의병 항쟁이 크게 고조되었다. 1908년에는 강원·전남·전북·황해도에서 의병항쟁이 크게 일어났다. 이때 장성에서 동지 김영백(金永伯)·이화일(李花一) 등 200여 명과 더불어 창의포고문을 배포하고 기병하였다. 정읍(井邑)에서 일본 헌병과 교전하여 크게 이겼다. 1908년 흥덕 소노령(小蘆嶺) 등에서 일본군과 접전하고 일본군 병참소를 공격하여 장총 3정과 군도 5정 및 탄환 다수를 노획하였다. 김영백이 1907년 10월 장성에서 기병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총 200정으로 무장하고, 1908년 정읍과 흥덕 등지에서 활약한 것이 확인되는 것을 볼 때, 주로 장성(長城)과 정읍·흥덕 일대에서 일본 헌병 및 순사대와 교전한 것을 알 수 있다. 1909년 6월 30일 동지들과 정읍군 소성면에서 작전을 모의 중 체포되어 북이면 헌병분견소에서 총살되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서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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