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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寅普

鄭寅普

1893. 5. 6 ~ 195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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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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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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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동제사

포상 정보

  • · 독립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0) 1893년 5월 6일 한성부(漢城府) 명례방(明禮坊) 종현(鍾峴, 현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서 정은조(鄭誾朝)와 달성 서씨(達城 徐氏)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아명은 정경시(鄭經施)이다. 자는 경업(景業)이며, 호는 위당(爲堂)·수파(守坡)·담원(薝園)·미소산인(薇蘇山人)이다. 후사가 없던 백부 정묵조(鄭黙朝)에게 출계하였다. 성천군수(成川郡守)와 이조참의(吏曹參議) 등을 지낸 부친을 비롯하여 조상 대대로 높은 관직을 역임한 명문가의 자제로서 어린 시절부터 유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양명학자 이건방(李建芳)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스승의 논의를 계승하여 허가(虛假)의 배격과 진실된 도리를 추구하는 학문적 자세를 갖고, 외세에 국권을 침탈당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정신의 고취에 전념하였다. 1911년에는 식민지가 된 조국을 독립시키고 민족정신을 일깨울 방도를 모색하고자 중국으로 유학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진행 중이던 신해혁명(辛亥革命)을 목도하고, 중국 학자 장빙린(章炳麟)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국학(國學) 관련 저작물을 접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양의 사상·학문을 기반으로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민족관을 형성하였으며, 사회를 개혁한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상하이(上海)에 거주하고 있던 문일평(文一平)·홍명희(洪命熹)·이광수(李光秀) 등 한국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다. 1912년에는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 등을 중심으로 중국에 망명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창립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한국인 유학생들의 면학을 돕고, 순국선열 추도대회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중국과 한반도를 오가며 독립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3년 11월 부인 창녕 성씨(昌寧 成氏)의 사망으로 귀국한 후에는 충청북도 진천(鎭川) 등지에서 은거하며 학문적 성과를 정리하였다. 1922년 4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교수로 초빙되어 1937년까지 동양학을 강의하였고, 협성학교(協成學校)와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에도 출강하였다. 1924년 5월부터 『동아일보』의 촉탁기자(囑託記者)로 활동하며 한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논설을 여러 차례 기고하였고, 을지문덕과 이순신 등 순국선열과 위인들의 선양 사업을 주도하였다. 1931년 5월 31일 이충무공유적보존회(李忠武公遺蹟保存會)를 창립하고, 안재홍(安在鴻)·조만식(曺晩植)·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위원에 선임되어 위토(位土) 채무를 변제하고, 묘소와 유적·유물을 보존하였으며, 현충사(顯忠祠)를 중건하였다. 1927년부터는 한국 고유의 정신문화를 보존·정리하는 국학 연구의 중심인물로서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편찬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29년 10월 30일 조선어사전편찬발기회가 조직되었을 때 교양위원에 선임되었고, 한국어의 역사적 변천에 대한 연구성과를 집필하였다. 동시에 일제의 식민사관 유포에 대항하여 민족 고유의 정신적 가치를 ‘얼’로 규정하고 이를 역사 서술의 중심으로 삼는 역사관을 확립하였다. 이에 대한 결과물로 1935년 1월부터 3월까지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서 연재하였다. 1931년에는 『동아일보』에 「조선고전해제(朝鮮古典解題)」를 기고함으로써 한국의 귀중한 기록 유산을 소개하였다. 1935년 정약용(丁若鏞)의 문집을 정리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출간할 때까지 편찬과정에서 안재홍과 함께 교열을 담당하였다. 1937년 7월 「경인훈민정음서(景印訓民正音序)」, 「훈민정음운해해제(訓民正音韻解解題)」 등을 저술하여 우리글의 보존에 기여하였다. 1940년 10월 중앙중학교의 노국환(盧國煥) 등이 최복현(崔福鉉) 교사의 지도로 비밀결사 5인독서회를 조직하여 운영할 때 국제정세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식 등을 파악하여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42년 7월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후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노해면(蘆海面) 창동(倉洞,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황화면(皇華面,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등지에서 은거하다가 광복 이후 상경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을 환영하고,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의 창립총회에 고문으로 참가하여 만주와 중국 대륙, 일본, 태평양 등지에서 돌아온 한국인들의 생활 보호에 힘썼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가 논의되자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의 최고정무위원으로 선발되어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 민족진영의 지도자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 자주적 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이후 비상국민회의가 미군정의 제의에 따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으로 개편되자, 소속 의원으로서 미군정의 자문역을 수행하였다. 원로 교육자로서 미군정이 새로운 교육과정을 만들기 위해 조선교육심의회(朝鮮敎育審議會)를 창설했을 때 교육이념분과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11월부터 국학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1947년 국학전문학교가 정식 인가를 받아 국학대학이 되자 학장으로 재직하며 한국사와 동양 고전을 강의하였다. 동시에 사회 전면에서 민족정신 앙양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맡아, 순국선열 추도대회의 집전, 해외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봉환과 기념물 건립 등을 추진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의 천거로 초대 감찰위원장으로 부임하였다. 1949년 7월 8일 상공부장관 임영신(任永信)의 독직(瀆職) 행위를 규탄하였다는 이유로 국회에서 감찰위원회 권한 축소안이 제출되자, 이를 비판하고 7월 22일 위원장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저술 활동과 교육 일선에서 민족정신 선양에 힘쓰던 중, 병환으로 인해 종로 한양의원(漢陽醫院)에서 요양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7월 31일 북한 내무서원(內務署員)에 의해 납북되었고, 이후 대한민국 국군의 북진에 따라 패퇴하던 북한군 행렬에 강제로 연행되던 중 가혹한 처우와 병환의 악화로 같은 해 11월 평안북도의 피란지에서 사망하였다. 광복 이후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책으로 엮은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발간하였고, 「3·1절 노래」·「광복절노래」·「제헌절가」·「개천절가」·「국학대학가」·「고려대학교가」·「대한부인회가」 등을 작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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