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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化善

趙化善

1892. 7. 13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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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趙化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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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평산(平山)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평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통의부
  • · 참의부
  • · 정의부
  • · 국민부
  • · 조선혁명군
  • · 조선혁명군정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관련 사건

  • · 영릉가 전투
  • · 쾌대모자 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1892년 7월 13일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고지리(古之里) 달성동(達城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조경복(趙景福)이다. 1920년 2월 만주로 건너가 최석순(崔碩淳)이 이끄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지안현지단(輯安縣支團)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독립단 지안현지단이 이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통합되면서 최석순이 이끄는 대한통의부 제2중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대한통의부 제2중대는 환런현(桓仁縣) 대아하(大雅河)에 군영을 두고 활동하였다. 1922년 5월 김여련(金汝漣)·김재수(金在洙)·이해룡(李海龍)·정창화(鄭昌化)·정인화(鄭仁化)·김천일(金天日)과 함께 평안북도 강계군에 잠입해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1923년 대한통의부 내에서 공화와 복벽이라는 이념과 항일전술에 대한 의견차이로 인해 갈등이 발생하자, 대한통의부는 의군부(義軍府)와 통의부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1924년 6월 남·북만주의 전 독립군세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 하에 모일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때 발표된 공동명의의 선언서에 의용군(義勇軍) 제2중대 대표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6월 26일 임시정부의 정식 인준을 받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義府, 이하 참의부)가 설립되자, 최석순과 함께 참여해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였다. 그해 9월 4명의 부하를 이끌고 평북 초산군(楚山郡) 남면 부평동으로 진입하였다. 부호들로부터 군자금 100여 원을 모집하는 한편, 이를 막기 위해 출동한 일제 경찰들과 초산군 강변에서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다시 부하들을 이끌고 초산군에 잠입해 부호들로부터 수백여 원에 달하는 군자금을 징수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1925년 3월 지안현 고마령(古馬嶺)에서 참의부 간부들이 모여 국내진입작전을 위한 군정회의를 개최하던 중, 초산경찰서에서 출동한 일제 경찰의 급습을 받아 참의장(參義長) 최석순과 소대장 최항신(崔恒信) 등 22명의 주요 간부가 전사하는 참변이 발생하였다. 이후 이규성과 함께 정의부(正義府)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6년 11월 지린성(吉林省) 판스현(磐石縣)에서 개최된 정의부 중앙총회에서 소대장에 임명되어 군사활동을 이어나갔다. 정의부는 1924년 7월 지린성 류허현(柳河縣)에서 소집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통해 대한통의부를 중심으로 설립된 독립운동연합체이다. 1928년 5월 정의부 소속이었던 김동삼(金東三) 등이 중심이 되어 지린성 근방 신안둔(新安屯)에 집결해 정의부와 참의부, 신민부(新民府)의 통일을 위한 유일당을 형성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해 11월 김동삼, 지청천(池靑天) 계열과 신민부의 군정위원회 측, 참의부의 김승학(金承學) 계열이 모여 혁신의회(革新議會)를 구성하였다. 이에 신민부의 민정위원회 측과 참의부 심용준(沈龍俊), 정의부 현익철(玄益哲)·고활신(高豁信) 등이 중심이 되어 1929년 5월 랴오닝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싱징(興京)에서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였다. 이때 국민부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부가 결성된 후 국민부 반대세력을 진압하는 데 힘을 썼다. 1930년 12월 이춘(李春) 등의 부하 7명과 함께 신빈현 대호륜(大呼倫)로 나가 국민부에 반대하는 공산당 세력에 대한 토벌을 진행하였다. 이듬해 8월에도 지역에서 국민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토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9월 일제의 전면적인 만주침략과 이에 따른 1932년 3월 만주국(滿洲國)의 수립은 국민부와 조선혁명군 등의 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다. 특히 동변도진수사(東邊道鎭守使) 우지산(于芷山)은 1931년 10월 15일 ‘동변도 보안총사령’을 자칭해 일제의 앞잡이로 돌아서고, 퉁화현(通化縣)·신빈현 등 당국에 국민부 관계자들을 체포하라는 훈령을 내리고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를 피하여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에 합류하였다. 1932년 3월 10일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참모장 김학규(金學奎), 대장 최윤구(崔允龜)·정봉길(鄭鳳吉) 등과 함께 일부 병력을 이끌고 중국의용군 왕동헌(王彤憲)·양석봉(梁錫福) 등의 부대와 합세해 한중연합군을 결성하였다. 신빈현 왕청문을 출발해 무순현 천금채를 향해 진군하던 연합군은 신빈현 남두령(南陡嶺) 지방에 이르러 숙영하였다. 이를 탐지한 신빈현성의 관동군이 포위공격을 했지만, 연합군이 적군이 점거하고 있던 고지대를 탈취하고 백병전을 벌인 끝에 관동군이 퇴각하였다. 연합군은 적들을 추격한 후 오후 3시경 서영릉가성(西永陵街城)을 점령하였고, 그 후 5일 간의 격전 끝에 목기(木旗)·흑우(黑牛)·상협하(上夾河) 등의 성진(城鎭)을 점령하였다. 8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사단장으로서 활동하며 청원현(淸原縣) 마산위자(馬山衛子)에서 일·만군 36명을 섬멸하는 등 무장투쟁을 격렬하게 이어나갔다. 조선혁명군은 그해 10월 제4차 회의를 개최하고 편제를 개편하였는데, 총사령 양세봉, 제1로 사령 박대호(朴大鎬), 제2로 사령 최석추(崔錫秋), 제4로 사령으로 최윤구가 선임되었다. 이때 제3로 사령으로 임명되었다. 제3로 사령으로 임명된 후 최윤구와 함께 심해(瀋海)·길해(吉海) 철도를 중심으로 파괴공작을 전개하였다. 1933년 7월 7일 영릉가(永陵街) 석인구(石人溝) 전투와 퉁화현 쾌대모자(快大帽子) 전투에서도 제3로군을 이끌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일익을 담당하며 중국연합군과 무장투쟁을 이어나갔고, 한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에도 힘을 쏟았다. 1934년 8월경에는 만주국 내에 있는 일본·만주국 요인들과 첩자들을 암살하기 위해 편의대(便衣隊)를 조직하였다. 편의대는 총 4대로 구성되었으며, 그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제1대는 최응선(崔應善) 이하 8명으로 구성되어 임강(林江) 방면으로 파견되었고, 제2대는 김동파(金東波) 이하 7명으로 구성되어 지안현 제3구 외차구(外岔溝) 방면으로 보내졌다. 정응선(鄭應善) 외 8명으로 구성된 제4대는 집안현 제1구 통구(通溝) 방면, 마지막 제4대는 직접 8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집안현 제2구 부유가(富有街) 방면으로 나가 활동하였다. 이와 함께 군자금 모집에도 꾸준히 힘을 쏟았다. 그해 9월에는 부하들을 이끌고 관전현 조장전자, 제7구 3차자 등으로 나가 부호들을 상대호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각 호에서 만 15세 이상 35세 이하의 청년들을 선발해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총사령 양세봉이 사망하고, 심화되는 일제의 압박으로 인해 조선혁명당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은 1934년 11월 군민(軍民)대표자회의를 열고 행정조직인 국민부와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을 통합해 조선혁명군정부(朝鮮革命軍政府)라는 통합기관을 조직하였다. 조선혁명군정부가 조직된 직후인 그해 12월에는 콴뎬현(寬甸縣) 하류(下流) 하소양지구(河小楊枝溝)에서 제3중대장 이영걸(李永杰)과 연합해 일본 자위단 유격대와 전투를 벌였다. 1935년 3월 지안현에 있는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데 힘썼다. 그해 9월 조선혁명군정부 총사령관 김활석은(金活石) 중국의용군 서내호(徐來好)·녹림호(錄林好), 그리고 중국 홍군(紅軍) 한사령(韓司令)과 연합할 것을 결의하고 퉁화현을 습격하기 위해 준비하였다. 이때 조선혁명군정부 제1방면 사령으로서 제2방면 사령 한금추(韓琴秋)와 함께 퉁화현 공격을 준비하였다. 한중연합군은 그해 일본·만주군을 상대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 12월 일본군은 조선혁명군정부의 근거지인 환런현(桓仁縣) 화원(花園)을 습격하였다. 격전 끝에 총사령 김활석(金活石)을 비롯한 20여 명이 사망하면서 조선혁명군정부는 다시 한번 타격을 입게 되었다. 1936년 9월 조선혁명군정부는 조직을 개편하고 군무부 아래 3개의 사령장으로 재편하였다. 이때 제1사령장 한검추(韓劍秋·韓琴秋·韓劍秀), 제2사령장 윤일파(尹一波, 본명 尹明浩)와 함께 제3사령장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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