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瀚朝
鄭瀚朝1890. 8. 1 ~ 1945. 5. 1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리청년회
- · 재만동포옹호동맹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3)
관련 사건
- · 1919년 공주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3) 1890년 8월 1일 전라북도 김제군(金堤郡) 백산면(白山面) 상정리(上井里) 요교마을에서 아버지 정기석(鄭基奭)과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 安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호는 하몽(何夢)·나귀(那歸)이다. 같은 마을 출신의 성리학자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경성신명측량학교와 경성공업전문학원을 다녔고, 1918년 공주영명여학교와 공주실업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공주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일로 붙잡혀 공주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는 전북 익산(益山)에서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였고, 삼례지국장을 맡았다. 1924년 익산군 이리(裡里)에 조선일보사 지국이 설치될 때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4월 익산군 이리청년회가 창립될 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전북기자단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2월에는 이리청년회관 건립을 위한 모집책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6년 1월 전북 전주·군산·옥구·임피·김제·부안·정읍·태인·익산 등 각 지역 단체의 청년 대표 50인과 함께 ‘우의적(友誼的) 연결을 신조로 사회봉사를 목적’ 한다는 기치 아래 전북병인지우회(全北丙寅知友會)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30일 단체의 명칭을 ‘하트당(黨)’으로 변경하고, 첫째 ‘해방운동의 원리를 토구(討究)하여 이론을 확립하며 민중교양에 주력한다’, 둘째 ‘현재사회의 결함을 지적하여 실제전(實際戰)의 전위(前衛)가 된다’라는 새로운 강령을 정한 후, 강연회 등의 계몽활동을 진행하였다. 이때 제1대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2월 28일에는 익산군 내 여러 노동단체들이 총연맹기관으로서 조직한 익산노동연맹(益山勞動聯盟)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일본에서 결성된 친일단체 상애회(相愛會)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働總同盟) 본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제정위원(制定委員)으로서 김정우(金廷宇)·배헌(裵憲)과 함께 상애회에 경고문을 발송하고자 계획하였다. 또한 송정노조쟁의(松汀勞組爭議)와 관련하여 박해를 받던 노조를 위문하고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대표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익산노동연맹에서 개최한 사상강연에서 「농민운동의 진체(眞諦)」 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그해 7월에는 신간회 익산지회 설립대회 선전문과 관련된 문제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취조를 받았다. 12월 8일에는 백남순(白南純)의 집에서 익산 지역 13개 단체 대표 30여 명과 함께 모여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결성하였다. 이때 다른 참석자들과 함께 재만 동포에 대한 중국 동삼성(東三省) 군벌정권 관헌의 비인도적 행위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이에 대해 항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일로 『중외일보』 지국장 임표(林豹)·『동아일보』 지국 총무 김병수(金炳洙) 등 70여 명과 더불어 이리경찰서에 붙잡혔다. 1928년 3월 6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군산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만기를 채우고 1928년 7월 27일 풀려났다. 1931년 10월에는 김제노동조합동맹파업과 관련하여 전북경찰부로부터 가택수색을 당하였고, 이리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그해 11월 8일 풀려났다. 1935년에는 이리공립보통학교 교실 증축 후원회 간부로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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