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元京
趙元京1882. 10. 20 ~ 1955. 6.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6)
관련 사건
- · 안성 이죽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6) 1882년 10월 20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이죽면(二竹面) 장계리(長溪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4월 1일에서 4월 2일까지 안성군 이죽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평양(平壤)·안주(安州)·의주(義州)·선천(宣川)·원산(元山)·진남포(鎭南浦)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천도교·개신교·불교계 대표 및 학생대표들은 만세시위와 독립선언서 낭독을 주도하고, 인편을 통해서 만세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 지역으로 전파함으로써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였다. 안성군 만세시위는 3월 11일 양성면(陽城面) 동항리(東恒里)에 위치한 양성공립보통학교와 안성 읍내에 위치한 안성공립보통학교에서 시작하였지만, 본격적인 전개는 3월 하순부터였다. 그리고 4월 1일부터 4월 3일까지 이죽면 일대에서 만세시위가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4월 1일 최창달(崔昌達)·이기훈(李起薰)·윤상구(尹商求)·이응식(李應植)과 함께 이죽면 두현리로 갔다. 그곳에서 도로 수리를 위한 부역에 참여하고 있던 인부들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어서 윤상구와 함께 마을 주민 수백 명을 인솔해서 죽산리(竹山里)에 있는 죽산경찰주재소로 몰려갔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죽산경찰주재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2일 죽산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죽산장날을 맞이하여 수천명의 군중들이 죽산장터에 집결하였다. 그 중에는 김용규(金容珪)·윤규희(尹奎熙)·최창혁(崔昌赫)이 죽산공립보통학교 학생 수십 명을 인솔해서 만세시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윤규희(尹奎熙)가 사전에 제작한 태극기를 앞세우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죽산시장 일대를 행진하였다. 오전 10시 무렵 문재홍(文在弘)은 일본인 상점에서 상품을 구매하려는 보통학교 학생들을 타일러서 상품 구매를 포기하도록 하는 한편, 군중들을 향해서 “조선이 독립하면 일본 화폐는 쓸모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일본 지폐 10전을 찢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4월 2일 이죽면 만세시위는 오후 4시에 잠시 멈췄다가 저녁 8시에 재개되었다. 장원리(長院里)·매산리(梅山里)·용설리(龍舌里)·장계리 등에서 모인 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죽산경찰주재소·죽산우편소·이죽면사무소·죽산공립보통학교 일대를 행진하였다. 죽산시장 일대에 모인 시위대는 다음 날인 4월 3일 새벽 1시 무렵에 해산하였다. 4월 3일 새벽 5시 만세시위가 재개되었다. 삼죽면(三竹面) 덕산리(德山里) 방면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이죽면사무소로 집결하였다. 이에 일제 당국은 보병 제79연대 소속 장병들을 이죽면으로 파견하였다. 일본군 제79연대 소속 장병들은 죽산리 입구에서 대치하고 있었던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대 3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어서 제79연대는 이죽면사무소에 가서 만세시위를 진행하던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였다. 이로 인해 시위대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안성군 이죽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일제 군경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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