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性基
趙性基1881. 11. 1 ~ 1919. 3.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02)
관련 사건
- · 1919년 함안군 군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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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2) 1881년 11월 1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하림리(下林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순팔(順八)이고, 이명은 조이수(趙已守)이다. 한학을 공부하였고, 군북면의 서산서당(西山書堂)에 출입하였다. 이때 지역 민족주의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항일의식과 국권회복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1919년 3월 20일 군북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함안군의 만세운동은 1919년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고 돌아온 조한휘(趙漢輝)·한관열(韓灌烈) 등이 지역 유지들에게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 곧바로 계획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서산서당에 모인 지역 인사들은 거사일을 군북면 장날인 3월 20일로 정하였다. 이어서 태극기 제작, 독립선언서 등사, 참여자 동원을 위한 각 지역별 책임자 선정, 일제 경찰과 밀정 감시 등 역할을 분담하고, 서산서당과 원효암(元曉庵) 의상대(儀湘臺) 등에서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때 조성술(趙性述)·조용태(趙鏞台) 등과 함께 거주지인 하림리와 인근 원북리(院北里)·모로리(慕老里)·월촌리(月村里)·유현리(柳峴里) 일대의 동지 규합과 군중 동원을 책임지게 되었다. 또한 조주규(趙周奎)·조경식(趙璟植)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가 장문이라 등사하기 어렵고 내용도 난해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수정해 다시 만들었고, 신창학교(新昌學校)의 등사기를 이용하여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0일 월촌리부터 각 마을을 찾아가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한 후, 오후 1시부터 시작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대한독립만세가 선창된 후 시위대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전단을 배부하였다. 그리고 3,000명으로 불어난 시위대와 함께 군북면 중심지를 행진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제 경찰이 당시 함안면으로 파견되어 있던 진해 중포병대대의 진압 참여를 요청하였다. 일제 군경의 폭력적인 진압이 시작되자 이에 맞서 시위대와 함께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제 군경은 군북경찰관주재소로 철수하였다. 오후 5시가 되자 5,000여 명 규모로 확대된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이동하여 다시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일제 군경은 주재소가 파괴되자 시위대를 향해 실탄 사격을 시작하였다. 이때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제 군경의 총격에 맞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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