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常烈
趙常1871. 12. 23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0)
관련 사건
- · 횡성군 횡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0) 1871년 12월 23일 강원도 횡성군(橫城郡) 정곡면(井谷面) 하산전리(下山田里, 현 우천면 산전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천도교인(天道敎人)으로, 4월 1일의 횡성군 횡성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에서는 이미 3월 27일 횡성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시위 시작과 거의 동시에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몇 번의 만세 외침을 끝으로 시위대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때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했던 천도교 대교구장(大敎區長) 최종하(崔宗河)는 지난 만세운동을 교훈 삼아 천도교인들을 조직적으로 규합하여 다시 시위를 계획하였다. 평소 일본의 한국 지배가 부당하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천도교들이 중심이 되어 다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하게 되었다. 만세운동에는 천도교인들뿐만 아니라 횡성읍 청년회와 기독교 감리교회(監理敎會) 지도자인 정해경(鄭海璟)과 탁영재(卓英才)도 참여하면서 규모가 확대되었다. 또한 원주군(原州郡)과 영월군(寧越郡)·인제군(麟蹄郡)의 천도교인들도 참여하기로 하였다. 주도인물들은 4월 1일 횡성시장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고, 서로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시위를 준비하였다. 시위 당일인 4월 1일, 태극기를 숨기고 장터로 향하였다. 장터 입구에는 천도교 측 청년들이 나와 장꾼들을 인솔하였고, 상점 철시도 점검하고 있었다. 원주·영월 등지에서 온 천도교인들과 함께 군중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렸다. 오후 5시경, 정해경이 군중 앞으로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동지들과 함께 준비하고 있던 태극기를 꺼내어 만세를 외쳤다. 주도자들의 선창에 장터에 있던 군중도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이어서 갑천면(甲川面) 매일리(梅日里)의 김윤배(金允培), 정곡면 가좌곡리(佳佐谷里)의 김순서(金順瑞), 횡성면 읍상리(邑上里)의 전성수(全聖洙), 영월군 양변면(兩邊面) 주천리(酒泉里)의 김성서(金聖西), 인제군 서화면(瑞和面) 천도리(天桃里)의 김윤신(金允信) 등 천도교인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1,3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장터를 누비며 만세시위를 펼쳤다.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마친 후 주도인물들과 함께 횡성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로 가서 만세시위를 이어가기로 하였다.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헌병분견소로 이동하였는데, 당시 분견소는 원주의 보병 제79연대로부터 병력지원을 받아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일제 군경의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군중과 함께 경계를 뚫고 분견소로 들어가려고 할 때, 뒷산 언덕에서 총탄이 발포되었다. 어둠을 틈타 날아온 총탄에 강승문(姜勝文)·강달회(姜達會)·하영현(河永賢) 등 4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시위대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이어지는 일제 군경의 가혹한 탄압에 정해경·김성서·김윤신 등 다른 주도인물 23명과 함께 현장에서 붙잡혔다. 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그해 7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 결혼으로 내려진 은사령(恩赦令)으로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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