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基信
趙基信1892. 9. 13 ~ 1972. 5.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3)
관련 사건
- · 강화군 부내면(3.18)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3) 1892년 9월 13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 관청리(官廳里)에서 태어났다. 강화장터에서 포목상을 하였으며, 기독교인이었다. 1919년 3월 18일 강화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강화군의 감리교계 기독교인 유봉진(劉鳳鎭) 등은 1919년 3월 1일 이래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어 있음을 파악하고 강화도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고자 하였다. 3월 17일 교동면(喬桐面) 지석리(芝石里)에 위치한 장윤백(張允伯)의 집에서 같은 기독교도인 황일남(黃日男) 등과 만나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았다. 그 자리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선두에서 활동하는 결사대원으로 나설 것을 다짐하였다. 3월 18일 태극기를 품속에 넣고 유희철(劉熙哲)·황일남 등과 함께 부내면 장터로 향하였다. 사전 연락을 통해 부내면 윗 장터와 아랫 장터로 만세시위에 참여하려는 10,000여 명의 주민들이 집결하였다. 오후 2시경 다른 결사대원들과 함께 가장 먼저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것을 신호로 10,000여 명의 주민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유봉진 등의 지휘에 따라 만세시위 대열을 조직하고 큰 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은 김덕찬(金德贊) 등 한국인 순사보를 만세시위의 현장으로 출동시켰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아랫 장터에서 계속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유희철과 함께 붙잡혔다. 그러나 시위대는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군청으로 행진하였고, 시위대의 요구로 강화군수 이봉종(李鳳鍾)이 독립만세를 외칠 정도로 만세시위가 격화되었다. 그 결과 일제 경찰로부터 풀려나 밤늦게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육지에서 강화도로 출동한 일제 군경의 탄압으로 다시 붙잡혔다.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소요죄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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