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啓承
曺啓承1880. 10. 14 ~ 1943. 4.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3.19)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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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0년 10월 14일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 진북면(鎭北面) 금산리(錦山里)에서 태어났다. 11세에 부친을 따라 함안군(咸安郡) 여항면(艅航面) 외암리(外岩里)로 이주하였다. 호는 서암(棲巖)이다. 한문 교육을 받은 지역 유림으로 1919년 3월 10일 함안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에 항의하여 송병선(宋秉璿)이 자결하자 제문을 지어 조문하였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자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에게 항의서를 보내어 일제 경찰의 요주의 대상 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1919년 고종 장례식에 참여한 지역 인사들이 3월 5일 돌아와서 서울 만세운동 소식을 전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함안군 만세시위가 계획되었는데 여기에 참여하였다. 함안군 장날인 3월 19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 등사, 태극기 제작 등 준비를 위한 역할 분담을 하였는데, 연락책의 역할을 수행하여 동지 규합과 군중 동원에 힘을 보탰다. 3월 19일 아들 조병대(曺秉大)와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비봉산(飛鳳山)에서 지낸 고천제(告天祭)에 참석하고, 읍내 중심부인 봉성동(鳳城洞)에서 시작된 시위의 선두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수백 명으로 시작한 만세시위는 장날 시장에 나온 군중이 합세하면서 삽시간에 3천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단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찰관 주재소, 군청, 법원출장소, 우체국 등 일제 식민지배 기관에 진입하여 관리들을 제압하고 기물과 서류를 파손하였다. 이때 시위대를 지휘하였으며, 특히 이종찬(李鍾瓚)·안혁중(安赫中)과 함께 함안군수 민인호(閔麟鎬), 경찰서장 기타무라 하루토(北村晴澄)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증명서를 교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무력으로 만세시위를 해산하였다. 일제 군경은 다음날인 3월 20일까지 대대적인 검거 작전으로 만세시위 참가자를 탄압하였다. 이때 아들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그해 8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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