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敬七
趙敬七1873. 11. 1 ~ 1919. 4.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3.1운동
- · 제암리 학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73년 11월 1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향남면(鄕南面, 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堤岩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기독교를 수용하고 감리교 신자로 생활하였다. 1919년 4월 5일 발안(發安)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제암리에서는 천도교 전교사인 안종환(安鍾煥)과 안정옥(安政玉), 그리고 감리교 신자인 안종후(安鍾厚) 등 천도교계와 감리교계 인사들의 연합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0일경 독립선언문과 그 외의 격문을 입수한 천도교계 인사들은 3월 25일 최초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안종환·안정옥 등은 이날 주민들을 규합하여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 횃불을 밝히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제암리 주민들의 만세운동은 주변의 여러 지역과 연합하여 4월 5일의 발안장터 만세시위로 발전하였다. 4월 4일 안종후로부터 발안장터 만세시위에 대한 계획을 듣고, 안진순(安珍淳)·안필순(安弼淳)과 함께 제암리 감리교계 인물들의 대표로 발안장터 만세운동 계획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결합하였다. 천도교계에서는 안종환과 안정옥·안봉순(安鳳淳)· 홍원식(洪元植) 등의 인사들이 결합하였다. 4월 5일 아침 마을 주민들을 규합하여 발안장터로 향하였다. 이정근이 독립만세의 구호를 선창하자,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이를 신호로 삼아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면서 발안장터의 한복판으로 뛰쳐나왔다. 이정근 등의 지휘에 따라 시위대의 선두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제암리 주민들이 시위행렬을 갖추도록 하여 다른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던 일제 경찰은 대규모 시위대가 주재소를 향해 행진하자, 이를 확인하고 즉시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시위대가 해산 명령에 불응하고 계속하여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제 경찰들은 시위대를 향해 위협사격을 하였다. 이에 다른 주민들과 함께 주재소를 향해 돌팔매질로 대항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직접적으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경찰들은 칼을 빼들고 주재소로 근접하는 주민들에게 휘둘러 시위를 해산시켰다. 4월 6일 이후 일제 군경이 대거 출동하여 다수의 주민들을 체포하였다. 4월 13일 일본군 79연대 소속의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이끄는 20여 명의 일본군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4월 15일 부대를 이끌고 제암리에 도착한 아리타는 주민들의 동태를 일제에 보고해 온 친일파 조희창(趙熙彰)의 정보를 통해 제암리의 천도교도와 감리교도가 수원 서남부 지역 만세운동의 근원이라고 확신하였다. 아리타는 부대원 약 20여 명으로 제암리를 포위하고 20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모이라고 하였다. 이에 마을의 거의 모든 성인 남자들이 예배당에 모였다. 이를 확인한 아리타의 부대는 예배당의 문을 안팎으로 걸어 잠그고 못까지 박은 후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다행히 밖으로 나오는 사람까지 대기하던 일본 군인들이 총으로 쏘아 죽였다. 이에 노경태(盧慶泰) 한사람을 제외하고 예배당 안에 있던 모두가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