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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璟奎

趙璟奎

1876. 6. 1 ~ 1950.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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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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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咸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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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76년 6월 1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소포리(小浦里) 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20일 함안군 군북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조상규(趙相奎)·이재형(李在蘅)·조용효(趙鏞孝)·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과 1919년 3월 20일 군북면 군북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만세시위의 구체적인 계획은 3월 10일 경부터 백이산(伯夷山) 서산서당과 원효암(元曉庵) 의상대(儀湘臺) 등에서 논의되었다. 서산서당에 모일 때는 한문 강학으로 위장하였고, 원효암 의상대에서 논의할 때는 나무꾼으로 가장하여 일제 경찰과 밀정의 눈을 피하였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등 만세시위에 필요한 물품을 제작하는데 조력하였으며, 군북면 각 지역의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책으로도 활동하였다. 3월 20일 오전 9시 동촌리(東村里) 신창학교(新昌學校) 교정에서 학생 50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북면 경찰관주재소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이 출동하여 만세시위는 해산되었다. 이후 군북 장터로 이동하여 인근 냇가에서 오후 1시 경부터 다시 만세시위를 재개하였다. 재차 일본군이 출동하여 공포탄을 발사하는 등, 위협을 가하였음에도 굴하지 않고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로 행진하여 일제 관헌과 몸싸움을 벌이고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사격으로 현장에서만 20명이 사망하였다. 이때 시위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부상을 입고 피신하였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오른팔에 관통상을 입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의령의 한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신경이 손상되어 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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