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柄國
趙柄國1883. 3. 26 ~ 1955. 3.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청송군 현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3년 3월 26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현서면(縣西面) 복동(福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6일과 27일 양일간 현서면 화목(和睦)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화목장터 만세시위는 진보면(眞寶面) 진안리(眞安里)장터 만세시위에 이어서 청송군에서는 두 번째로 일어난 만세운동이었다. 처음 화목장터 만세운동을 계획한 인물은 이웃 마을 수락동(水洛洞)에 사는 조현욱(趙炫郁)이었다. 조현욱에게서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격문을 무계동(武溪洞)에 사는 사돈 신태휴(申泰烋)와 함께 받았다. 계속 독립을 소망하고 있었기에 조현욱의 격문을 받고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26일 아침, 조현욱·신태휴 등과 함께 마을 사람 50여 명을 이끌고 화목장터로 향하였고, 도중에 참여하는 인원이 더욱 늘어났다. 오후 1시경 장터에 이르러 만세시위 주도인물들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꺼내어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 소리에 장터에 있던 수백 명의 군중이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만세시위 소식을 들은 주재소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보 2명이 출동하여 총칼로 시위대를 위협하여 강제로 해산시켰다.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던 조현욱과 신태휴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붙잡히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다음날 만세시위를 계획하며 늦은 밤까지 마을 사람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힘썼다. 다음날인 27일, 말을 타고 만세시위를 선두에서 지휘하였다. 사람들이 다시 모여 화목장터로 향하였다. 이때에도 길에 있던 군중이 호응하면서 시위대에 동참하였다. 장터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시위 군중은 500~600 명을 헤아렸다. 사촌동(沙村洞)에 사는 이형(李瀅)은 미리 손수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군중은 만세를 부르면서 태극기를 흔들며 장터로 행진하였다.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던 시위대 앞에 한국인 경부(警部)와 순사들이 막아서며 만세시위를 저지하였다. 시위대와 일제 경찰들 간에 대치 상황이 벌어지자 군중은 더욱 더 모여들었고, 이때 선두에 서서 군중을 총지휘하였다. 시위대를 막아서는 한국인 경부에게 호통 치자 더욱 많은 군중이 가세하였고 만세시위는 격렬해졌다. 이를 본 일제 경찰들은 말에서 떨어뜨려 체포하려고 하였고 군중은 구출하기 위하여 경찰들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오후 6시경 청송경찰서장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하였다가 만세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고 군중을 향하여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총소리에 군중은 흩어지기 시작하였으며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다른 주도인물 4명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5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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