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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益鉉

崔益鉉

1833. 12. 5 ~ 1907.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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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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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포천(抱川)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포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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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최익현 의병부대
  • · 화서학파

포상 정보

  • · 대한민국장(1962)

관련 사건

  • · 을사늑약 반대투쟁
  • · 중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장(1962) 1833년 (음)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내북면(內北面, 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加采里)에서 아버지 최대(崔岱)와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 李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찬겸(贊謙)이며, 호는 면암(勉菴)이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고조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서서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1836년 4세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충북 단양(丹陽)으로 이주하여 금수산(錦繡山) 자락에서 한동안 살았다. 1838년 6세부터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큰 기대를 받았으며, 1841년 9세 때 김기현(金琦鉉)에게 수학하여 유학의 기초를 닦았다. 1843년 11세 때 경기도 양근군(楊根郡) 후곡(厚谷, 현 양평군 서종면 서후리)으로 이주하였다. 1846년 14세에 벽계(蘗溪)에서 강학 중이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이항로는 ‘면암(勉菴)’이란 호를 내리고 ‘낙경민직(洛敬閩直)’ 네 자를 대자(大字)로 써 주어 학문을 권면하였다. 1852년 (음)10월 한필유(韓必裕)의 딸 청주 한씨(淸州 韓氏)와 혼인하였다. 1855년 (음)2월 춘도기(春到記)에서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여 권지(權知)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에 임용되어 관직으로 진출하였고, 1859년에는 청요직(淸要職)인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과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거쳤다. 1860년 서울의 남촌(南村)으로 집을 옮겼고, 그해 (음)6월에는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862년에는 충청도 신창현감(新昌縣監)을 제수받았다. 1866년 (음)4월에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지만, 같은 해 (음)5월 어머니가 별세하여 포천으로 돌아갔다. 1868년 스승 이항로가 사망하였고, 모친상을 마쳤다. 같은 해 (음)9월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이에 국정 개혁을 위해 당시의 폐단[(時弊)] 네 가지를 없애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네 가지는 첫째, 대규모 토목공사를 중지할 것, 둘째, 가렴주구를 그만둘 것, 셋째, 당백전(當百錢)을 혁파할 것, 넷째, 사대문세(四大門稅)를 금지할 것 등이다. 당시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고 있었는데, 이 네 가지는 흥선대원군의 추진했던 정책들과 관계가 깊었다. 이 상소로 인해 탄핵을 받아 바로 삭직을 당하였으나, 곧 고종의 특지로 정3품 통정대부에 오르고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으로 제수되었다. 1873년 (음)10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직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정치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때 친정(親政)을 염두에 두던 고종은 상소를 받아들이고 특명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제수하였다. 같은 해 (음)11월 5조의 대의(大義)를 담은 2차 상소를 올려 흥선대원군 정권의 폐단을 전반적으로 비판하며 퇴진을 촉구하였다. 이 상소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하야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골육 간에 이간을 부추겼다는 죄목으로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 (음)3월 풀려났다. 1876년 (음)1월 22일 일제의 개항 요구에 조정의 여론이 분분할 때, 경복궁 뜰에 엎드려 화의를 배척한다는 의미로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를 올려 개항을 적극 반대하면서 그 이유를 다섯 가지로 열거하였다. 첫째,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야욕은 그 속성이 무한정하므로 개항 후 결코 그 야욕을 모두 채워줄 수가 없다. 둘째, 개항 후 우리의 유한한 토산품과 일제의 무한한 공산품 양자 간에 교역이 이루어지게 되면, 한국의 재정은 파탄지경에 빠져 일제에 철저하게 예속되고 말 것이다. 셋째, 왜(倭)는 금수와 다름없는 서양과 일체한 몸이기 때문에 개항 후에는 서양의 천주교가 조선 전역에 범람하여 유교의 윤리·도덕적 질서가 붕괴될 것이다. 넷째, 제국주의의 야수적 침략 속성으로 인해 개항 후에는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를 겁탈하는 등 반인륜적 침탈행위가 자행될 것이다. 다섯째, 지금 일제와의 화친문제는 사람으로 남느냐 짐승으로 전락하느냐 하는 이른바 ‘인수(人獸)’의 문제가 달려 있기 때문에, 과거 청나라의 침략으로 야기된 중화와 오랑캐, 곧 ‘화이(華夷)’의 문제였던 병자호란과는 그 본질이 다른 것이다. 이로써 개항이 가져올 일제의 야만적 침략 속성과 현실적 위험성을 간파·통찰하여 국가에게 경고하였다. 이후 개항 반대 요구가 전국적으로 빗발쳤으나, 결국 일제의 요구는 수용되어 1876년 2월 27일 12개 조항의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가 체결되었다. 이 일로 같은 해 (음)1월 25일 전라도 흑산도로 위리안치 처분을 받아 3년간 유배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일제와 청국이 개입하였다. 특히 일제는 이를 기회로 삼아 (음)6월 경복궁을 무단 점거하였다. 이어 조선을 장악할 목적으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한편, 일제는 김홍집 친일내각을 급조하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내세워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경을 단행하는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1895년 (음)8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음)11월 단발령(斷髮令)이 선포되자, 전국적으로 반발이 거세지며 일제와 친일내각에 대한 반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같은 해 (음)12월 3일 단발을 거부한 명목으로 동문 후배 유기일(柳基一)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전동(典洞, 현 종로구 견지동)의 사관(私館)에 갇혔다. 같은 해 (음)12월 26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고, 이후 고종이 칙령을 내려 단발령은 정지되었다. 1896년 (음)1월 5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를 해산하기 위해 정부는 선유대원(宣諭大員)을 임명하여 각지로 파견하려고 하였다. 1896년 (음)1월 7일 선유대원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1898년 의정부 찬정(贊政)과 궁내부 특진관(特進官) 등 요직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거듭 상소를 올려 모두 사직하고, 12조의 시무책을 올렸다. 1900년 (음)4월 고향을 떠나 충남 정산군(定山郡, 현 청양군) 장구동(藏龜洞)으로 이사하였다. (음)10월 구동정사(龜洞精舍)에서 선비들을 모아 강회(講會)를 열어 위태로운 국운과 도학의 앞날을 걱정하고 그 대책을 토론하였다. 1901년 (음)4월에는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주재한 임피(臨陂)의 낙영당(樂英堂, 현 군산시 성산면 고봉산 소재) 강회에 참석하였다. 이 강회에 인근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호남의병을 선도하게 되는 전해산(全海山)과 이석용(李錫庸) 등도 참석하였다. 1902년 (음)3월 다시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직하였다. 1904년 (음)7월 궁내부 특진관과 의정부 찬정에 임명되었으나, 상경하지 않고 사직 상소만 올리고 계속 정산에 머물렀다. 1905년 1월 고종의 소명을 받고 상경하여 수옥헌(漱玉軒, 경운궁 중명전)에서 고종을 배알하고, 5조목의 수차(袖箚)를 올렸다. 국가의 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왕이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어진 인재를 선발하여 정부를 맡기고, 세금을 많이 거두는 일을 금지해서 백성을 보전할 것이며, 학교를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고, 신의를 닦아서 이웃 나라와 교섭하며, 나라의 예법을 바로잡아 말세의 폐단을 구제할 것 등 다섯 가지를 건의하고 정책에 반영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내정 개혁과 일제 배척 등의 내용을 담은 상소를 4차례나 올렸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5년 2월 17일 경기도 관찰사에 제수되자, 즉시 사직소를 올리면서 자신을 경기관찰사로 임명하는 것은 5조목의 건의를 수용하지 않고 무마·호도하려는 것이라고 성토하였다. 이어 혼란한 시국을 수습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면 일제에 부역하는 매국적을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소투쟁으로 인해 같은 해 3월 11일 일제의 한국주차헌병대 사령부에 끌려가서 고초를 겪고, 3월 13일 포천 본가로 강제 귀향되었다. 그러나 포천 본가에서 10여 일을 머문 뒤 다시 상경해 서울 교외의 서강(西江)에 머물며 상소를 올려 반일과 개혁에 힘을 모아 나라의 자존을 수호해줄 것을 고종에게 간곡히 건의하였다. 이로 인해 3월 23일 재차 일제 헌병대사령부로 끌려가 이틀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자주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대운동이 거세게 벌어졌고, 여기에 호응하여 그해 11월 29일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려 을사늑약의 폐기와 체결을 주도한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단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리고 같은 뜻을 담은 상소를 12월 10일에도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상소투쟁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함을 깨닫고 항일의병투쟁을 계획하였다. 1906년 1월 19일 노성(魯城)의 궐리사(闕里祠)에서 동지 및 사우와 함께 강회를 열었다. 이는 항일의병운동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 단계의 모임으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포고문인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을 짓고, 원근의 유생 수백 명을 모아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어 함께 모인 유생과 함께 구국투쟁을 결의한 「노성궐리사강회시서고조약(魯城闕里祠講會時誓告條約)」을 작성하였다. 이 무렵 전북 고창(高敞)의 고석진(高石鎭)과 진안(鎭安)의 최제학(崔濟學), 태인에 거주하던 전 낙안군수 임병찬(林炳瓚) 등이 의병을 도모하던 중이었으며, 정산에 있던 면암을 초빙하여 의병장에 추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에 1906년 2월 하순경 의병을 일으키고자 정산을 떠나 호남으로 내려갔다. 항일투쟁의 방략을 협의하고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같은 해 5월 30일 담양(潭陽)의 추월산 용추사(龍湫寺)에서 호남 유림의 거두이자 항일의 중심 인물인 기우만(奇宇萬)을 만났다. 이때 호남 각지의 명망지사 50여 명과 함께 구체적인 방안도 논의하였다. 그리고 거의(擧擬)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의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한 격문을 발포하였으며, 최제학·임병찬 등 의병에 동참하기로 한 112명이 연명한 「동맹록(同盟錄)」을 작성하여 항일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그해 6월 4일 74세의 나이로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武成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와 동시에 의병을 일으킨 이유 및 명분과 투쟁 목적을 천명하는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고종에게 올렸고, 일제의 기만적 배신행위를 16조목에 걸쳐 열거하며 국권 침탈상을 규탄하고 그 맹성(猛省)을 촉구하는 장문의 「기일본정부서(奇日本政府書)」를 일제 통감부로 보냈다. 당시 80여 명에 불과한 의병부대가 무성서원을 떠나 태인 관아로 이동하자, 군수 손병호(孫秉浩)는 그 기세에 눌려 도망쳤다. 태인 관아의 무기를 접수하고 전력을 보강한 의병부대는 다음날인 6월 5일 아침 일찍 정읍(井邑)을 향해 갔는데, 정읍군수 송종면(宋鍾冕)이 항복하여 무혈 입성하였다. 다시 정읍에서 전력을 보강한 의병부대는 내장사에 들어가 유진(留陣)하였다. 이 무렵 고창의 고석진이 김재구(金在龜)·강종회(姜鍾會) 등과 함께 전투력이 뛰어난 포군 30명을 거느리고 가세해 전력이 보강되었다. 6월 6일 내장사를 떠나 순창(淳昌)의 구암사(龜岩寺)로 들어간 후 다음날 읍내로 진격하자 순창군수 이건용(李建鎔)이 항복하였다. 이에 순창 관아에 의병부대의 본부를 설치하고 유진하였다. 6월 8일 남원(南原)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곡성(谷城)으로 향하자 주민들이 의병부대를 환영하였고, 군수 송진옥(宋振玉)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곡성에서 남원으로 진출하는 길이 차단당하여 다시 순창으로 돌아왔다. 이때 의병부대의 규모가 900명으로 늘어났지만, 절반이 유생이었고 실제 무기를 지닌 의병은 300명 정도였다. 6월 11일 의병부대는 전주(全州)와 남원에서 출동한 진위대(鎭衛隊)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의병 해산을 명하는 고종의 조칙과 관찰사 고시문을 보내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에 순창 읍내 북쪽의 금산(錦山)에는 전주 진위대가, 동쪽인 대동산(大同山)에는 남원 진위대가 각각 포진하여 읍내 관아의 객관을 중심으로 유진한 의병부대를 압박하였다. 상대가 진위대 군인임을 알게 되자,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의병부대의 해산을 명하였다. 결국 그해 6월 14일 임병찬(林炳瓚)·고석진(高石鎭)·최제학(崔濟學)·양재해(梁在海) 등 13의사와 함께 진위대에 붙잡혔다. 6월 18일 서울로 이송되어 헌병대사령부에 구금되었고, 이후 일제의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8월 14일 한국주차군 사령부로 끌려가 일제의 육군이사(陸軍理事)로부터 유형(流刑) 3년을 받았고, 8월 28일 일본 쓰시마섬(對馬島)으로 끌려갔다. 유배소인 쓰시마섬에 도착한 후 감금소에서 모진 수난을 당하였다. 쓰시마경비 보병대대장 소에지마(副島以辰) 소좌는 관을 벗고 경례를 하도록 명령한 뒤 강제로 관과 건을 벗기려 하였고, 총검을 들이대며 위협까지 가하였다. 이에 죽을 결심으로 도착 당일 저녁부터 단식에 들어갔고, 고종에게 올릴 유소(遺疏)를 임병찬에게 구술하였다. 그러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소에지마 대대장이 단식 3일째 되던 날 사과하고 단발과 변복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그날 저녁부터 죽을 먹었지만, 고령에 3일간의 단식으로 몸은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지게 되었다. 결국 1907년 1월 1일 새벽 74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이즈하라(嚴原) 시내에 있는 슈젠지(修善寺)에 이틀간 안치되었다가, 배편으로 같은 달 5일 아침 동래부(東萊府, 현 부산광역시) 초량(草梁)에 도착하였다. 같은 해 5월 12일 사림장(士林葬)으로 논산의 무동산(舞童山, 현 상월면 지경리 소재) 기슭에 유해를 안장하였다가, 1909년 예산군(禮山郡) 광시면(光時面)으로 이장하였다. 문집으로 사후에 제자들이 편집·간행한 2종의 『면암집』이 있다. 1908년 46권 23책으로 간행된 무신본(戊申本)은 일제를 성토한 내용으로 인해 대부분 압수당하고 일부만 남아 있다. 1931년 48권 24책으로 다시 신미본(辛未本)이 간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정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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