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榮鐸
趙榮鐸1887. 12. 10 ~ 1936. 7. 1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8)
관련 사건
- · 영해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8) 1887년 12월 10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원황리(遠黃里)에서 태어났다. 국병(國柄)과 성권(聖權)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영해면(寧海面) 성내리(城內里)의 성내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의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은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平壤)으로 가는 길에 서울에서 고종 인산(因山)과 3월 1일 만세운동을 경험하고, 그대로 귀향하여 거사를 계획하였다. 김세영은 구세군(救世軍)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남세혁(南世爀)·남효직(南孝直)·권상호(權相鎬) 등 기독교계 지도자 및 지역에서 영향력이 큰 권(權)·남(南)·박(朴)·백(白)·이(李)의 5개 향반(鄕班) 가문과 협의하여 성내장터의 장날인 3월 18일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정하고, 기독교인들과 농민들을 광범위하게 규합하였다. 정규하로부터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이에 동의하여 참여를 약속하였다. 3월 18일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사전에 참여를 약속한 주민들과 함께 성내장터로 이동하였다. 오후 1시경 정규하와 박의락(朴義洛)이 장터 한복판으로 나와 각각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장터에 나와 있던 3,0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이에 호응하여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정규하·권태원 등의 지도에 따라 시위대열을 형성하고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대의 선두에서 면사무소, 보통학교, 순사주재소 등 영해면의 곳곳을 행진하였다. 3,000여 명의 대규모 만세시위에 직면한 주재소의 일제 경찰들은 기세가 꺾여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다만 일본인 경찰부장은 거만한 자세로 만세시위의 해산을 명령하며 시위대의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대는 곤봉과 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시설을 파괴하고 일제 경찰들을 구타하였다. 이후 차례로 우편소·면사무소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고 집기 등을 파괴하였다. 만세시위대와 함께 영해면을 완전히 장악하고 밤새도록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성내장터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격렬한 만세시위를 지역의 경찰력과 헌병대만으로는 진압할 수 없었기 때문에 3월 19일 오후 대구(大邱)의 보병 80연대 소속 일본군 17명을 지원병력으로 파견하였다. 일제 군대는 헌병대와 함께 시위대를 향해 무차격 사격을 가하며 만세시위를 탄압하였다. 이날 8명의 주민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16명이 크게 부상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헌병대에 붙잡혔다. 일제 헌병대의 조사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혐의로 정규화·권상호 등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함께 재판에 회부된 인물은 모두 96명이었다. 같은 해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 공무집행 방해죄, 건조물 손괴죄 등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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