蔡光默
蔡光默1850. 7. 15 ~ 1906. 4. 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홍주의병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을미사변
- · 을사늑약
- · 홍주성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77) 1850년 7월 15일 충청남도 홍주(洪州)에서 아버지 채동식(蔡東軾)과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평강(平康)이다. 자는 명숙(明叔), 호는 구연(龜淵)이다. 어려서 부친의 훈육을 받아 기개가 있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어김이 없었다 한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과거를 보지 않았으며 오로지 효(孝)와 의(義)에 뜻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데 힘썼다. 1895년 8월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당시 안창식(安昌植)·안병찬(安炳瓚) 부자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홍주의병(洪州義兵)에 참여하였다. 그해 11월 28일 안창식 등과 함께 청양(靑陽)에서 향회를 실시하였다. 이 향회에 지역의 유생들이 참석하여 군사 활동을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80여 명의 의병이 모집되었다. 다음 날 안병찬과 함께 이들을 인솔하여 홍주성에 들어갔다. 12월 1일 저녁 정산(定山)과 청양(靑陽)의 이봉학(李鳳學)·이세영(李世永)·김정하(金正河) 등 수백 명이 성안에 들어왔다. 김복한(金福漢)을 비롯한 전직 고관들이 홍주관찰사 이승우(李勝宇)에게 동참할 것으로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의병들은 참서관 함인학(咸仁鶴)과 경무관 강호선(姜浩善) 등을 체포하고 창의의 깃발을 조양문 위에 걸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이승우가 의병에 참여하였다. 다음날 홍주관아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김복한은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면에 통문을 띄웠다. 이때 김복한의 지시에 따라 이창서(李彰緖)와 함께 남면 소모관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가 태도를 바꾸어 의병 지휘부 인사들을 차례로 구속하여 홍주의병이 와해되었다. 1898년 송수만(宋秀晩)·김운락(金雲洛)·심선승(沈宣承)·이건석(李建奭)·이문화(李文和)·이세진(李世鎭)·김연식(金璉植) 등과 더불어 을미사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소청(疏廳)을 설치하여 이름을 도약소(都約所)라 하고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적에게 복수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국외로 도망한 적을 잡아오지 않는 외부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법부대신 한규설(韓圭卨)을 탄핵하였다. 탄핵소를 받은 한규설은 ‘지난번 채광묵의 상소가 올라오자 신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죄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라면서 사직소를 올렸다. 이에 고종은 비답을 내려 사임하지 말라고 하였다. 반면 이완용은 ‘그가 무고(誣告)한 것에 대해서는 반좌율(反坐律)이 있겠지만, 신은 통분하고 억울함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라면서 이들이 자신을 무고한 죄를 다스려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고 자신의 무고함을 밝혀달라고 청하였다. 1901년 8월 조정에서는 내부주사직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국모의 복수를 할 기약도 없는데 어찌 먼저 영예를 받을 수 있느냐면서 강하게 거절하였다. 1904년 6월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해 김기우(金箕祐)·이기하(李起夏) 등과 이를 성토하는 통문을 작성하였다. 통문을 배포하기 전에 평리원 판사 허위(許蔿)를 만났으며, 통문을 황성신문사에 맡겼다. 그해 6월 20일 밤 김기우·허위·김연식(金璉植)·이상천(李相天) 등과 함께 일본 공사를 만나 일본인의 요구가 무리함을 질책하고 담판을 하였다. 1906년 안병찬·박창로(朴昌魯) 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민종식(閔宗植)을 의병장에 추대하고, 그해 3월 15일 예산(禮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민종식 의병부대 소속으로 홍주의 동문 밖 하고개에 진을 치고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의 저항에 후퇴하였다. 다음날 새벽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안병찬과 박창로 등이 체포되고 의병은 패하여 흩어졌다. 이때 집으로 피해 있다가, 5월 9일 민종식 의병장이 재차 의병을 일으키자 참여하였다. 이후 민종식 의병장과 함께 홍산(鴻山)·서천(舒川)·비인(庇仁)을 점령하고, 5월 19일 홍주성을 공격하여 다음 날 아침에 점령하였다. 홍주성을 점령하고 의병부대를 재편할 당시 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와 함께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병을 앓고 있었으나, “국난을 당하여 순사(殉死)함은 곧 내가 평소에 가졌던 뜻이거늘 어찌 집안에서만 있을까보냐”하고 아들과 함께 활동을 지속하였다. 5월 30일 일본군의 공격으로 홍주성이 함락되었다. 의병은 치열한 시가전을 감행하면서 방어하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성으로 들어오는 일본군을 막다가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복한은 “저 학식도 없고 의리도 모르는 놈들은 참으로 말할 필요도 없고, 평상시에 의리를 공부하여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자도 각자 도망가 살려고 한다. 그들이 채광묵의 의로운 죽음을 보고서 혹 부끄러움이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안병찬은 “내가 형과 더불어 살고 죽는 마당에 의(義)만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형은 먼저 목숨을 다하여 순의(殉義)하려는 본심을 얻었는데, 유독 나만은 완둔(頑鈍)하여 함께 죽기로 약속한 형만을 잃었습니다”라고 애통해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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