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鄭用大

鄭用大

1882. 2. 28 ~ 1910. 1. 26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鄭用大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기 적성(積城)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적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정용대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77) 1882년 2월 28일 경기도 적성군(積城郡, 현 양주시) 남면(南面) 경신동(庚申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양촌공파 21세손이다. 조부는 의병으로 활동한 정인태(鄭寅泰)이며, 아버지는 정두환(鄭斗煥)이다. 자는 중범(重凡)이고, 호는 의암(毅庵)이며, 이명으로 한자를 달리 한 정용대(鄭容大)를 썼다. 대한제국 군대 정교(正校) 출신으로 동장(洞長)을 하면서 마을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된 후 국권회복을 위해 전국에서 다시 의병들이 봉기하자,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창의좌군장(倡義左軍將)으로 칭한 후,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의 의병들을 이끌고 활동하였다. 또한 인근의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경기도 적성·양주(楊州)·풍덕(豊德)·교하(交河)·통진(通津)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인근에서 활동하던 이은찬(李殷贊)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지속적인 의병활동을 위해 군자금과 군수품 등을 모집하였다. 1908년 2월 27일에는 양주군 석적면(石積面)에서, 그해 3월 2일에는 양주군 회암면(檜巖面)에서 일제 군경과 교전하였다. 1909년 6월 경까지 이러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다가, 그해 9월 9일 일본군 적성헌병대에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1909년 10월 2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교형(絞刑)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12월 1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1910년 1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다가 1910년 1월 26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권구훈⋮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