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載冕
鄭載冕1882. 2. 14 ~ 196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민회
- · 명동학교
- · 간민교육회
- · 대한민국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3
- · 13 독립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82년 2월 14일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학전(鄭學篆), 어머니는 김성약(金聖約)이다. 본관은 연일(迎日)이다. 본명은 정병태(鄭秉泰)이고, 호는 벽거(碧居), 이명은 일광(一光)과 우산(雨山)이다. 기독교 신자였다. 1898년 평남 순안(順安)에 있던 측량학교에 입학하였다. 1902년 서울로 가서 상동교회 전덕기(全德基) 전도사와 교류를 통해 민족문제와 선교문제 등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1904년 상동교회 부설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였다. 상동청년학원에서 주시경(周時經)·장도빈(長道斌)·남궁억(南宮檍)·현순(玄楯)·조성환(曺成煥) 등에게 국어·국사 등을 배우면서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배우고 실천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07년 상동청년학원을 졸업한 후 비밀결사 단체였던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으며,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의 교원이 되었다. 이후 1908년까지 원산에 있던 보광학교(普光學校)에서 근무하였다. 1908년 이동휘(李東輝)의 권유로 ‘북간도교육단’을 결성하고 단장직을 맡았다. 같은 해 북간도 룽징(龍井)에 있던 명동학교(明東學校)로 초빙되어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1906년 북간도 지역에는 이상설이 주도하여 세웠던 서전서숙(瑞甸書塾)이 강제 폐교된 이래 새로운 교육기관의 설립이 요구되고 있었다. 이에 김약연(金躍淵)·박정서(朴禎瑞) 등이 룽징 부근인 명동촌(明東村)에서 서전서숙의 이념을 계승한 명동서숙(明東書塾)을 건립하였다. 이때 다른 북간도교육단 인사들과 함께 명동서숙에 부임하는 조건으로 성경 교육과 예배를 보는 것을 제시하였다.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명동서숙은 기독교 학교로 개편되었고, 북간도뿐만 아니라 연해주와 국내 회령(會寧) 등지에서도 입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1910년 3월 중국 정부와 협조하여 이동춘(李同春) 등과 함께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를 조직하였다. 간민교육회의 총무로서 교민사회의 자치활동과 경제력 향상을 위해 앞장섰다. 1912년에는 북간도 교계 16명 중 한 명이 되어 캐나다장로교 선교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그 결과 독립운동가들의 피신지 역할을 했었던 제창병원(濟昌病院)이 설립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919년 2월 25일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국제정세와 파리강화회의에 대해 논의하는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연해주 니콜스크-우스리스크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북간도의 한인 지도자들도 참석하게 되었는데 김약연·이중집(李仲執)과 함께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1919년 3월 13일 김약연·김영학 등과 함께 룽징과 국자가(局子街)에서 일어난 항일시위를 주도하였다. 같은 달 21일 옌지현(延吉縣)·허룽현(和龍縣)·왕칭현(汪淸縣)의 한국인 대표들이 모여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를 결성하였을 때 명동촌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의사부원(議事部員)으로 선출되었다. 회장이었던 구춘선(具春先)과 함께 독립운동에 대한 통첩을 중국 베이징(北京) 정부와 지린성장(吉林省長) 등에게 발송하였다. 1919년 6월 일본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룽징으로 온 방원성(方遠成)을 자신의 집과 캐나다 선교사 마틴(S. H. Martin· 閔山海)이 경영하던 제창병원에 머물게 하였다. 같은 해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북간도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1월 항일투쟁방법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중한노공동맹연합회(中韓勞工同盟聯合會)에 기독교계 대표로 참여하였다. 이후 용정촌에서 목사 및 태광학교(太光學校) 교사로 활동하며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20년 7월 28일 임시정부에서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안정근(安定根)·왕삼덕(王三德)이 파견되자, 자택이었던 사일상회를 제공하여 회의가 진행되는 데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국민회(國民會) 대표 김성호(金聲鎬), 군정서(軍政署) 대표 김석구(金錫九), 광복단(光復團) 대표 최경호(崔敬昊), 의군단(義軍團) 대표 이창섭(李昌涉), 신민단(新民團) 대표 이환수(李煥秀), 의민단(義民團) 대표 정사선(鄭仕善)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방향에 대해 논의하였다. 한편 명동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정행단(正行團)과 학교 등이 중국관청에 의해 해산된 후에는 구춘선·김하석·남세극 등과 함께 국민회 조직을 확장하는 데 힘썼다. 한인들의 억울한 죽음을 해명하기 위한 시민대회를 개최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1923년 2월 중국 군경에 의해 한인 청년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윤화수(尹和洙)·김정기(金正琪)와 함께 교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룽징시 시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와 함께 외교위원 자격으로 옌지도윤(延吉道尹) 도빈(陶彬)을 면회하고 자치권을 줄 것을 요구하였다. 1925년 중국 난징(南京)에 소재한 금릉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였고, 평양에서 1년간 공부한 뒤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8년 룽징에 있던 은진중학교 교목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국내로 이주하였고, 함경북도 청진에 있던 신암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1944년 영흥경찰서에 붙잡혔다. 당시 일제 경찰들은 민족주의 경향을 가진 목사들을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배포한다는 명목으로 체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붙잡혔다. 이후 고원경찰서로 옮겨져 조사를 받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에는 독립촉성기독교 중앙협의회 회원, 『기독공보』 사장직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남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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