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景善
崔景善1898. 7. 4 ~ 1983. 7. 2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독립청년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1919년 대동군 용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1898년 7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용산면(龍山面)에서 태어났다. 1916년 순안(順安) 의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1919년 용산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한 후, 이어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일 용산면에 소재한 안식교회당에서 500명의 시위대를 지휘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재차 만세시위를 계획하였지만, 일제 관헌의 감시로 여의치 않자 중국으로의 망명을 감행하였다. 같은 해 4월 20일 신의주를 건너 중국 안둥현(安東縣)에 도착한 후 안병찬(安秉贊)을 만나 독립운동 의사를 전하며, 상하이행을 준비하였다. 그해 5월초 이륭양행(怡隆洋行)의 선박을 이용하여 상하이에 도착한 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고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청년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은 평남 청년층의 주도로 조직된 일종의 별동대로, 단원을 200명으로 한정하고 임시정부 교통국과 긴밀한 연락 관계를 유지하며 국내 연락·선전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청년단의 일원으로서 국내와의 연계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기관지인 『청년혈(靑年血)』 발행에 참여하였다. 1919년 8월부터는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의 애국금수합위원(愛國金收合委員)으로 위촉된 후,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의 지시로 국내에 들어와 평양을 비롯한 평안남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자금 수합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10월부터 1920년 4월까지 황해도 옹진군(甕津郡), 평남 강동군(江東郡)과 평양(平壤) 일대에서 황보영주(皇甫永周)·김재현(金在鉉)·김정오(金貞梧)·이정오(李貞梧) 등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자금 모금은 각지의 동지들과 비밀리에 연계하여 전개되었고, 이를 통해 모집된 상당한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할 수 있었다.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이어가다가 1920년 4월 중순경 강계경찰서 소속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3년간 옥고를 겪다가 1923년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황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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