陳秉基
陳秉基1896. 3. 13 ~ 1935. 11.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5)
관련 사건
- · 평양 인쇄직공 동맹파업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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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5) 1896년 3월 13일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약목면(若木面) 덕산리(德山里)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에는 경성부 견지동(堅志洞)에 거주하였다. 대구 협성중학에서 2년간 수학하였고, 1911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예비학교를 1학기 다닌 후 킨죠오(錦成)중학에 입학하였다. 1914년 3월 킨죠오중학을 졸업하고 주오대학(中央大學) 경제과에 입학하여 한 학기 다니고 중퇴하였다.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기수(技手)가 되어 근무하였다. 토지 측량을 위해 출장 다니면서 지방 지주들의 소작인들에 대한 횡포를 목격하였고, 1920년부터 경제문제에 관심을 갖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으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 1922년 1월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에 가입하고 1923년 전조선청년당대회에 참가하였다. 6월에 꼬르뷰로(조선공산당 중앙총국) 국내부가 조직되자 평양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었다. 1923년 봄부터 평양 지역에서 활동하며 평양 조선노동동맹회 상무위원이 되었다, 7월 15일 조선노동동맹회가 주최하는 노동대강연회에서 ‘우리의 살 길은 단결’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같은 해 8월 4일 수해로 고통에 빠진 무산노동자를 구제하기 위해 노동자수해구제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조선 노동동맹회의 사무를 보면서 안영기(安永基)와 김기황(金基璜) 등 동지를 비밀리에 규합하고 이들에게 혁명가(革命歌)를 가르쳤다. 꼬르뷰로 국내부 관련 혐의로 1923년 10월 3일 평양경찰서에 붙잡혔고, 10월 15일 평양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해 11월 24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2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24년 9월 평양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풀려난 이후 서너 달 요양생활을 하고 1925년 2월 열린 평양 오월청년회(五月靑年會) 임시총회에서 평양청년동맹으로 조직명을 변경하고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0일에는 황해도 재령군(載寧郡) 북률면(北栗面) 사인면(舍人面) 등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한 소작인 수탈을 규탄하기 위해 위문사 겸 조사위원으로 선정되어 출장을 나갔다. 같은 해 평양 인쇄직공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1925년 3월 4일 후원회를 조직하고 상무위원으로 선정되었다. 3월 15일에는 평양경찰서 고등계에서 파업단의 주요인물을 붙잡아 조사할 때 함께 조사를 받았고, 3월 23일에 방면되었다. 한편 그해 4월 15일 서울에서 열린 전조선기자대회(全朝鮮記者大會)에 『신흥청년(新興靑年)』 잡지의 평양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어서 4월 17일 이 대회 소집을 바탕으로 중국인 요리점 아서원(訝敍園)에서 개최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에 참석하였다. 또한 이튿날인 18일 관훈동 박헌영의 집에서 모여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11월 1일에는 조선노농총동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7월 22일 신의주에서 조선공산당 조직이 발각되면서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8년 2월 13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31년 2월 19일 만기 출옥한 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힘쓰다가 1935년 11월 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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