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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基燮

陳基燮

1911. 12. 13 ~ 1934.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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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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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영흥(永興)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영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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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영흥농민조합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911년 12월 13일 함경남도 영흥군 억기면(憶岐面) 구만리(九灣里)에서 태어났다. 1930년 영흥농민조합(永興農民組合)에 참가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하였고, 영흥농민조합을 재건하기 위해 구만리에서 구만반(九灣班)을 조직하여 야학(夜學) 실시, 소년·소녀 웅변대회 개최 등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계급의식을 고취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걸쳐 세계 대공황 영향이 전 세계와 식민지 조선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이와 같은 현상이 자본주의 경제의 모든 부분에 걸쳐 전면적이라는 점을 인식하였고, 국제정세의 변화 그 추이를 살피면서 혁명적 노동운동과 파업 투쟁과 같은 대중 투쟁과 이론적·계몽적 교육을 선도하였는데, 일제는 이러한 광범위한 사회운동에 대해 ‘검거 선풍’을 일으켜 탄압하고자 하였다. 1930년 12월 영흥농민동맹(永興農民同盟) 이후 순무산농민(純無産農民)의 단결체를 목표로 발전·개편하여 농민운동단체로 조직된 영흥농민조합(永興農民組合)에 참여하였다. 이 영흥농민조합은 1931년 9개의 면 단위 지부와 그 아래 170여 개의 반(班) 조직을 설치하며, 회원이 12,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발달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경 시위 도중 조합원이 일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자 대규모의 시위를 벌이게 되었고, 간부 등 영흥농민조합원이 일제히 검거되면서 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1932년 (음)1월 5일 밤 구만리 반장 이근영(李根榮), 차여중(車呂重) 등과 함께 영흥농민조합의 구만반을 재조직할 것을 결정하는데, 행동강령으로는 문맹퇴치, 조혼폐지, 노농 러시아 지지, 사유재산제도 파괴, 미신타파, 허례폐지의 6개 조를 채택하고 공산주의를 목표로 한 결사 조직을 마쳤다. 이어 구만리 내에서 야학 교육을 실시했는데, 동짓날 황인철(黃仁喆) 집에서 10여 명이 집합한 가운데 조혼폐지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희망한다는 내용의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32년 단오절(端午節)에는 정도권(鄭道權)의 집에서 소년·소녀 웅변대회를 개최했는데, 아이들 30명 정도를 모아놓고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는 문장을 작성하여 아이들에게 주는 등 그 준비와 개최 등을 함께 수행하였다. 이외에도 1932년 덕흥지부회(德興支部會)를 설치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영흥농민조합재건위원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불꽃』·『뉴스』 등을 발행하면서 선전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 일제 관헌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32년 12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33년 2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34년 5월 23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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