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성
金基聲1900. 2. 5 ~ 1946. 2. 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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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900년 2월 5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현 안성시)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김선경(金先敬), 혹은 김계성(金啓成)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직업은 농업인으로서 안성군 원곡 및 양성(陽城) 일대에서 1919년 4월에 전개된 3·1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1운동의 소식은 안성 일대에도 퍼져 3월 말에는 독립 만세 운동의 기운이 고조되었다. 원곡면의 경우 같은 해 3월 25~26일에 걸쳐 원곡면 내에서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으며, 3월 28일에는 원곡면 내가천리(內加川里)에서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에 이웃한 칠곡리를 포함해 외가천리(外加川里)·지문리(芝文里)·죽백리(竹栢里)·월곡리(月谷里) 등 원곡면 12개 리 중 6개 동리로 만세 운동의 영향력이 확산하였다.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등은 같은 해 3월 29~31일에 연이어 시위를 주도하였다. 다음 날에는 면사무소를 대상으로 본격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자 하여 사전에 다른 동리에도 연락하였다. 4월 1일 아침에 이들은 칠곡리에서 군중을 먼저 모으다가, 저녁에는 사전에 연락한 다른 동네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나아갔다. 저녁 8시경에는 횃불을 든 1,000여 명의 주민이 운집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원곡면사무소에 투석하며 면장과 면서기에게 태극기를 주고 만세를 부르도록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희룡(李熙龍) 등의 권유로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여 오후 10시경 원곡면사무소에서의 만세 시위부터 본격적으로 참가하였다. 만세 시위 군중은 원곡면을 장악하자 이유석의 주창에 따라 성은고개를 넘어 양성면(陽城面)으로 넘어갔다. 마침 같은 날 양성면에서는 수백 명의 군중이 역시 만세 시위를 벌이고 오후 9시에 돌아가려던 즈음 원곡면에서 넘어온 만세 시위 군중에 고무되어 다시 만세 시위를 전개하여 2,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오후 10시경 경찰주재소로 나아가 주재소 경찰들을 축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른 동료들이 숙박시설을 파괴하는 동안 최은식(崔殷植)·김중식(金重植) 등과 주재소 사무실에 불을 질러 서류와 물품을 불태우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양성우편소로 진출하는 과정에서도 송우필(宋禹弼)·홍재의(洪在義) 등과 함께 솔선하여 우체국에 돌을 던졌다. 나아가 시위 군중은 일본인 상인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파괴하였으며, 양성면사무소에 진입해 관련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였다. 평택으로 통하는 전신주와 다리 등을 파괴하고 철도의 침목을 빼놓는 등 일제 경찰의 증원을 저지하였다. 다음 날인 2일 오전 4시에는 원곡면사무소에 다시 진입하여 역시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후 일제의 대대적 검거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붙잡혔다. 오랜 구류를 거쳐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혐의로 징역 5년(미결 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구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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