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光惠
崔光惠187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8)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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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8)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강계면(江界面) 동부동(東部洞)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19년 당시 45세로 1875년생으로 추정된다. 교회 장로이자 계례지병원(桂禮知病院) 전도사로서 4월 8일 강계군 강계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강계군의 만세운동은 학교의 교원과 학생들, 기독교 및 천도교 세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3월 15일 밤에 강계읍내 각소에 ‘한국독립만세’라고 적힌 지편(紙片)이 살포되었다는 총독부측 기록이 있지만 3월 중순까지 이 지역은 잠잠하였다. 하지만 영실중학교 교사 김경하(金京河)와 동료 교사 정준(鄭儁), 교회 장로이자 명신학교 학감(學監) 한봉민(韓奉珉) 등이 비밀리에 모여 만세시위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 사이 영실중학교 학생들이 스스로 나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려고 하자 김경하가 현재 논의가 진행 중이며 때를 기다릴 것을 주문하며 제지하였고, 이에 학생들은 태극기 2,000장을 제작하며 기다렸다. 김경하 등은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천도교 인사와 일반 유지들을 접촉하였고 3월 24일 회의를 열어 만세시위를 결의하였다. 이튿날인 3월 25일 다시 모여 구체적인 시위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때 회의 참석자들은 만세시위를 결의하면서 연판장에 서명 날인을 하여 시위를 끝까지 책임지기로 하였다. 당시 이 회의에 참석하였고 취지에 공감하여 연판장에 기독교 측 인사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4월 8일 11시 미리 약속한 대로 강계읍내 남장대(南將臺) 예배당의 종소리에 맞춰 일제히 학생들이 뛰어나와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곧 장날 장꾼들까지 합세하여 수천 명을 이루게 되었다. 시위대는 평화롭게 행진하며 북문삼거리에 있던 헌병분견소를 지나 북문 쪽에 다다랐다. 그때 갑자기 북문 성루 위에서 군중을 향하여 일제 헌병들이 발포하여 정준을 비롯한 4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29명이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이때 함께 붙잡혔다. 재판 결과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소요죄 등으로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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