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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炯奎

趙炯奎

1883. 12. 28 ~ 1940.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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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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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안(咸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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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함안군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3년 12월 28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사촌리(舍村里)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경중(景中)이고, 호(號)는 은계(隱溪)이다. 1919년 3월 20일 함안군 군북면 군북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한 조석규(趙碩奎)가 친형이고, 조주규(趙周奎)는 사촌 형이다. 함안군 군북면의 만세시위는 그 전날 일어난 함안 읍내 시위와 연속선상에서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고 돌아온 조한휘(趙漢輝)·한관열(韓灌烈) 등 지역 인사들에 의해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곧바로 함안에서도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군북면 사촌리 조용대(趙鏞大)의 사랑채에 함안면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희석(李喜錫)이 군북 지역 인사들의 시위 참여를 요청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여기서 조석규·조주규·조경식(趙璟植) 등과 함께 3월 19일 함안 읍내 시위 참가와 동시에 다음날인 20일 군북면에서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의 구체적인 계획 수립과 준비 작업은 3월 10일 서산서당(西山書堂)에서 논의되었다. 이 모임에서 군북면 장날인 20일을 거사일로 하고, 장소는 군북시장으로 하였다. 독립선언서 등사, 태극기 제작 등 시위에 필요한 물품 제작과 지역별 인원 동원 등의 임무는 참석자들이 나누어 맡았다. 3월 19일 함안 읍내 시위에 조상규(趙相奎) 등 군북 지역 인사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만세시위를 위해 일제 경찰의 본격적 검거가 시작되기 전 다시 군북으로 철수하였다. 3월 20일이 되자 군북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운동을 이끌었다. 전날의 함안 읍내 시위로 인해 일제의 감시가 심해졌기 때문에 만세시위는 아침 일찍 신창학교(新昌學校) 교정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시위가 군북면에 파견되어 있던 일본군 진해만 중포병대대의 진압에 의해 해산되자, 장터 인근 냇가에서 오후 1시부터 다시 재개하였다. 시위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전단을 나누어주고, 시위대의 앞에 서서 맹렬히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가 군북 지역을 순회하면서 규모가 5,000여 명까지 불어나자 진해만 중포병대대와 일제 경찰은 공포탄까지 쏘면서 거칠게 진압하였다. 시위대는 여기에 맞서 투석전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군북면사무소와 군북경찰관주재소를 향해 진격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위협을 느낀 일제 군경은 결국 실탄으로 조준 사격을 하였고, 현장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쓰러졌다. 이때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고, 그 자리에서 잡혔다. 총탄을 맞은 왼쪽 어깨는 완치되지 못해 평생 팔을 쓰지 못하였다. 이 일로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2년 복역을 끝내고 풀려난 이후에도 만세계(萬歲契)를 조직하여 군북면 만세운동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등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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